지리산 사람들에게 배운 '느림'의 기쁨

하동 강동오 매암차박물관장의 '진정성'을 생각하며

등록 2003.06.23 14:35수정 2003.06.2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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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나무 숲으로 펼쳐진 녹차밭
감나무 숲으로 펼쳐진 녹차밭김대호
"이따가 시간나먼 올라오씨요"
"무슨 일로…몇시에나…?"


매암차박물관 전경
매암차박물관 전경김대호
되묻는 내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김재원(43)씨는 전화기를 '뚝' 끊는다. 황망하기 그지없다. 피아골자락에서 1천여평의 녹차밭을 일구고 사는 재원씨가 어제 처음으로 대면한 나에게 차 한잔 마시러 오라는 것이다.

지리산에 터를 잡은 선배와 산길을 타고 20여분 오르자 작은 흙집이 하나 나타났다. 성호씨는 바위틈에 듬성듬성 자리잡은 벌통을 손보는 중이었다.

갈색으로 곱게 찻물 든 다기에 '쪼르르' 물이 고이고, 몇 마디 말을 건네기도 전에 시간은 점심나절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리 건너 경상도 땅 하동에 있다는 매암차박물관에 가볼 양이던 나는 연신 시계를 쳐다보지만 피아골학생수련원 원장인 윤보혁(44) 선배와 재원씨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을의 주정뱅이 아저씨 이야기로 시작해 연곡사 멋쟁이 스님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수백년을 전해온 옛 찻잔들
수백년을 전해온 옛 찻잔들김대호
"시간이 좀 먹냐? 천천히 살아라 이놈아."


내 마음을 알아차린 선배는 이내 한방 먹인다.

5년의 기자생활을 정리하고 무작정 떠난 지리산행에서 나는 구례군과 하동군의 관광안내도를 펴들고 가볼 곳 20여군데를 미리 점찍어 놓은 터였다.


강박증처럼 시간을 묶어 놓고 싶었던 것인지? 세상사에 집착하고 참견하는 것이 직업인 나는 늘상 핸드폰과 E-메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욱 급해지고 시간은 일상에 족쇄를 채웠다.

몇 시 몇 분에 어디에서 어떤 목적으로 만나 원하는 바를 기필코 달성하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 나는 산사람들의 '느림'의 여유가 갑갑하고 익숙치 않았다.

녹차를 덖는 무쇠솥
녹차를 덖는 무쇠솥김대호
"마음을 비우면 천지가 내 것인데 마음을 채우려 하면 잡생각이 파고드는 법이다."
"형님, 그새 득도했는가 봅니다."

기어이 풋고추에 상추쌈으로 점심을 떼우고 서야 오가피주에 거나해진 선배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화개장터를 지나 악양면에 접어드니 마을 한가운데 매암차문화박물관(http://www.tea-maeam.com) 간판이 눈에 들어 왔다.

콘크리트에 대리석 붙은 틀에 박힌 박물관을 연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감나무 숲에 여기저기 시골풍경 같은 바윗덩이가 있고 수수한 녹차 밭이 펼쳐져 있었다.

관장인 강동호(38)씨를 만나 차 이야기를 들어볼 요량이었지만 출타하고 집은 비어 있었다. 족히 수백년은 됐을 성싶은 청자백자 다기며, 화로를 비롯해 무쇠솥, 찻상 등 손때묻은 유물들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었다.

녹차밭에 둘러싸인 야외 공연장
녹차밭에 둘러싸인 야외 공연장김대호
선배는 이곳이 단순히 유물만을 보는 일반적인 형태의 박물관이 아니라 참여자들이 차의 제조과정과 차에 관한 이야기들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체험형 박물관인 동시에 차를 알리고 저변화시키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거기다 야외 공연장까지 마련돼 있어 매년 차 축제도 열린다.

매암차문화박물관의 시초인 매암제다원은 매암 강화수옹이 1926년 목조건물로 지었다. 이어 1963년 고 강성호옹이 6300평의 다원을 조성하면서 지난 38년간 잊혀져 있던 고유의 전통 차제조 기법을 재발견해 내고 보존하는데 힘써 오다가 자손인 강동오 관장이 1999년부터 문을 열었다.

고려 청록차의 일종인 용단승설은 수색이 맑고 깨끗하며 풋풋한 향이 일품인데, 이를 재현해 오던 매암 강화수옹은 아직도 차를 손수 빚는다.

감나무 밑에 놓인 나무의자에 앉아 있자니 좀이 쑤셨다.

감나무밑의 나무탁자
감나무밑의 나무탁자김대호
인근에 박경리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된 최참판댁을 찾아 양반댁 서희와 머슴 길상의 흔적이라도 찾아볼 요량이었다.

바쁜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박경리 선생과 악양면의 인연으로 시작해 서희와 길상의 사랑,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을미사변 등이 지나간 1897년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평사리를 비롯해 지리산, 서울, 간도, 러시아, 일본 등에서 펼쳐지는 최씨 집안의 가족사를 자세히도 늘어놓는다.

"사람이 조급한 것은 사람과 시간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선배는 이곳 관장인 강동오씨가 한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선행되어야 할 첫 번째 조건은 "진정성" 이다. 서로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답하여 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상대의 진정성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과거의 습관대로 상대방을 재단하고, 인간이 만들어 논 여타의 경험, 그리고 인간의 입술로 만들어 낸 알량한 약속으로 상대의 "진정성" 자기식 감정대로 관계를 형성하고 만다.

그 과정에서 서로 상처받고 "진정성"을 보낸 상대방의 삶은 이로 인해 서서히 소멸되어 가는 것이다. 사람의 일/ 세상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랑도 감정으로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성"을 진실로 인정한다면 싸움과 이별은 없다'

나는 참 바쁘게 살아 왔던 것 같다. 바쁘게 산다는 것은 살아온 시간을 뒤돌아보고 자신의 면상에 묻은 땟국물을 발견하는데 그만큼 소홀해 지게 할 것이다. 또한 사람을 만나면서 과연 내 마음속에 '진정성'을 담고 있었는지…. 내 마음을 살펴보는 '느림'이 없는데 그것이 있었겠는가?

작은 토담 전통찻집
작은 토담 전통찻집김대호
'느림'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지리산에서 스스로 '느림'을 배우지 못하고 느리게 사는 사람들을 찾아 바쁘게 움직이는 내 꼬락서니라니‥.

섬진강변을 따라 화개장터를 따라 전라도 땅으로 접어들면서 선배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내일은 핸드폰도 끄고 차도 버리고 피아골 계곡 따라 사람들 사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합니다. 혹시 저 찾는 전화 오면…."

아차…'느림'도 훈련이 있어야 하나보다.

어줍잖은 산사람 흉내가 들통나고 여전히 내가 도시인임을 직감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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