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무협소설> 전사의 후예 170

용봉향로(龍鳳香爐) (5)

등록 2003.06.27 09:01수정 2003.06.2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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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정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곳으로 보내지 않은 것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천의방의 규율을 살펴보면 정정당당하게 실력을 겨뤄 부방주가 사람은 방주라 할지라도 내치거나 좌천시킬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임기는 무제한이며 방주가 바뀔 때에만 바뀌도록 되어 있다. 스스로 물러서기 전까지는 임기가 보장된 것이다.


물론 예외가 있다. 무림천자성이나 무천의방을 명백히 배반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있을 때는 예외이다. 그래서 장일정을 일부러 골탕먹여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남궁혜 역시 기회를 보아 내치기로 마음먹었다. 어쩌면 그녀가 비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로 하여금 형벌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현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장일정과 남궁혜를 낱낱이 감시하고 있는 눈길이 있다. 그는 장일정이 속명신수가 명한 대로 하지 않고 꾀를 부린다면 즉각 고변(告變)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형벌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한 그녀를 내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셈이다.


그래서 친한 줄 알면서도 짐짓 그녀를 믿는 척하면서 그녀로 하여금 제대로 형벌을 받는가 감시하도록 한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노회(老獪)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은 글자 그대로 늙은 여우처럼 교활하고 의뭉스러우며, 능갈친 사람에게 주로 사용되는 말이다.

속명신수가 바로 그랬다. 무천의방의 의원들은 속명신수를 가리켜 노회의 대명사라 하였다. 권모술수에 능하면서도 의뭉스럽고 능갈침이 어찌나 교묘한지 혀를 내두를 정도이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선부인 천강성의는 타고나기를 의원으로 타고난 사람이다. 고지식의 대명사이면서도 병들어 신음하는 환자를 보면 어떻게든 고쳐주려고 갖은 애를 쓰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흔히들 호부(虎父)에 견자(犬子) 없다고 한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의미의 말로 자식은 아비를 닮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속명신수 부자의 경우는 아니었다. 단순히 의술만 가지고 따진다면 호부에 견자 없다는 말에 부합되지만 사람 됨됨이를 가지고 따지면 전혀 다르다.

호부 아래에 견자가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부친인 청강성의는 무천의방의 방주가 된 이후 모든 의원들에게 환자를 대할 땐 부모 대하듯 하라하였다. 제 부모가 아픈데도 나 몰라라 하는 의원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그의 외호 가운데 성의(聖醫)라는 말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을 의원이었다.

속명신수는 한평생 그런 부친의 그늘 아래에 있었다.

부친의 성품을 너무도 잘 아는 그는 철이 든 이후 부친이 있을 때와 없을 때를 절묘하게 가렸다.

부친의 앞에서는 오로지 의술을 익혀 인술(仁術)을 베푸는 것이 하늘이 준 소명이라는 듯 굴었다.

그러나 부친이 없을 때면 그만한 난봉꾼이 없었다.

젊은 시절 속명신수는 희대의 색한(色漢)이었다.

모르는 사람은 그만큼 고고한 인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나 실상은 하루라도 계집을 품지 않으면 잠들지 못할 정도였다.

덕분에 인근 기원(妓院)의 기녀들 가운데 그의 수청을 들지 않은 여인이 드물 정도였다.

그러다가 한동안은 환자의 여식이나 부인을 추행(醜行)하는데 재미를 붙인 적도 있었다. 덕분에 여러 차례 개망신을 당할 결정적인 위기를 겪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언변으로 화를 모면하곤 하였다.

어울리지 않게 교언영색(巧言令色)의 대가였던 것이다. 아무튼 이때 식겁을 했는지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속명신수는 거부(巨富)가 되어가고 있었다.

뇌물을 받고 보직변경을 해주거나, 싼값의 약재를 비싼 값에 사들이는 척하면서 차액을 착복하였다. 또한 희귀 약재를 몰래 빼돌려 팔아 넘긴 결과였다.

아무튼 천강성의는 하나뿐인 아들이 비록 약간 아둔한 면은 있지만 무척이나 고지식하고, 성실한 것으로 알고 죽었다.

철저하게 자식에게 속은 셈이다.


"부방주님! 이러지 마시고 어서 일어나세요. 예? 저기까지만 그냥 가시고 다음부터 또 무릎으로 가시면 되잖아요? 예?"
"으윽! 으으윽! 낭자, 사내 대장부란 목에 칼을 들이밀더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하는 법이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그런 말씀하지 마시오."

장일정은 자꾸 부추기는 남궁혜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대로 할 수는 없다 생각하였다.

무릎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을 피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귓가에 쟁쟁한 부친과 사부, 그리고 사숙의 음성 때문에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젠가 사부는 의원의 길이 어떤 면에서는 형극(荊棘)의 길일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좋아 보여도 의원이 접하는 사람은 늘 아프다고 인상을 찌푸린 사람들이다.

평생 그런 얼굴만 보고 살아야 하니 의원이라 하여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요지의 말을 하면서 그런 말을 하였다.

무림제일 세력인 무림천자성!

그런 무림천자성 최고의 의료기관인 무천의방 부방주가 된 장일정은 너무도 고통스런 형극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장일정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원칙만은 지키고 살 것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있었다.

너무도 보고 싶은 선친의 음성 때문이었다.

'아버님! 소자, 꾀부리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겠습니다. 으윽! 그런데 너무 아프다. 허억! 돌 조각이라도 박혔나보다. 으윽! 이러다가 무릎을 아예 못 쓰게 되는 건 아닐까? 으으윽! 정말 아프다.'

이날 장일정은 산책로를 다 돌았다. 그가 형벌을 마치는데 걸린 시간은 꼬박 여덟 시진이었다. 두 무릎 모두 망가졌지만 특히 왼 무릎은 심하게 망가졌다.

작은 돌 조각 같은 것들이 많이 박힌 결과이다. 덕분에 장일정은 몇 달 동안이나 깡총거리며 뛰어 다녀야 하였다. 하여 그에게 새로운 외호가 붙여졌다.

독각동인(獨脚銅人)!

이것은 현재에는 거의 사용하는 사람이 없는 병장기의 일종으로 명칭대로 다리가 하나뿐인 동인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런 독각동인이 걸으려면 어떻게 걷겠는가? 깡총 깡총 뛰는 방법이외에는 없다.

이제 불과 약관도 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부방주라는 지고(至高)한 위치에 올라 있는 것에 배가 아팠던 무천의방의 다른 의원들이 붙여준 외호였다.

거의 모든 이들이 고소하다 생각하고 있었지만 단 한 사람, 유심선자 남궁혜만은 그가 그렇게 걸어다닐 때마다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음 속의 우상이자 정인이 남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한 것이 몹시 마음 아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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