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광개토대제와의 만남
가장 아래에는 수중동물 즉, 음(陰)의 대표격인 용이 등장하고 있다.
그 위 몸체에는 연꽃과 수중의 생물이거나 물가와 관련된 동물이 있고, 뚜껑이 의미하는 지상계(地上界)에는 산악과 짐승 및 신선이 있다.
그리고 천상계(天上界)를 의미하는 정상(頂上) 부위에는 봉황과 원앙이 배치되어 있다. 봉황은 양(陽)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따라서 눈앞의 물건은 음양의 체계를 구성원리로 삼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 가운데 뚜껑의 정상에는 한 마리의 봉황이 턱밑에 여의주를 끼고 날개를 활짝 펴서 웅비(雄飛)하려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어찌나 생생한지 당장이라도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갈 것 같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그리고 봉황의 눈 부위에 박혀 있는 붉은 보석이 야명주의 빛에 반짝이고 있어 더욱 신비스럽게 보여지고 있었다.
"흐음! 이건 분명 향로야. 헌데 이걸 뭐라 부르지? 맞아! 용에서 시작하여 봉황에서 끝났으니 용봉향로(龍鳳香爐)라고 하면 되겠군. 그런데 이걸 왜 여기에 놓았을까?"
이회옥은 향로를 집어들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어디 자세히 좀 볼까? 아차!"
신이 만든 듯 정교하기 그지없으면서도 휘황찬란한 향로를 이리저리 살피던 이회옥은 비로소 생각이 났다는 듯 뻗어가던 손을 재빨리 빼냈다. 자고로 천고의 영물이나 신기 어린 기물에는 보이지 않는 수호신이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였다.
온갖 기물들을 기록해 놓은 기서(奇書)인 천지기물경(天地奇物經)에 이르기를 해동 땅 봉래산(蓬萊山) 어딘가엔 먹으면 영원히 늙지 않는다는 주안과(朱顔果)가 열리는 곳이 있다고 한다.
천년에 한 번 열매가 맺히는데 그 향기가 어찌나 향기로운지 십리 밖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향기만 맡아도 수명이 십 년은 늘어난다는 그것을 함부로 따려다간 영영 이승을 하직하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열매가 맺힌 줄기 어딘가에 손가락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날개 달린 뱀인 비천사(飛天蛇)가 은신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에 물리면 세 발짝도 떼기 전에 한 줌 혈수(血水)로 변해버리게 된다. 워낙 독성이 지독하기 때문이다.
주안과 이외에도 천고의 영물 주위에는 비천사와 유사한 것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읽은 바 있던 이회옥이었기에 얼른 손을 뺀 것이다.
눈앞의 향로는 금의 무게만으로도 상당한 값어치가 있는 물건이다. 거기에 신의 솜씨인 듯한 정교함이 더해져 있으니 가히 무가지보(無價之寶)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그런 보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보배가 이토록 허술하게 놓여있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한 대비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딘가 극도로 예민한 기관이 설치되어 있다면 잘못 건드렸다간 작게는 손목이 잘리거나, 크게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생각한 것이다.
"흠냐! 안 되겠어. 만사불여튼튼이고, 언제든 조심하는 게 무병 장수하는 지름길이라고 하셨어."
이회옥은 생전의 이정기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저도 모르게 내뱉고는 병장기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그리곤 그곳에서 한 쌍의 판관필을 들고 와서 조심스럽게 용봉향로를 들어 올렸다.
생각과 달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회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향로의 주인이라면 이토록 허술하게 보관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흐음! 이 기관이 만들어진지 오래 되서 그러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이회옥이 모르고 있는 일이 있었다.
이곳 다물연공관은 광개토대제의 우장이었던 을지혁이 만든 곳이다. 이후 오랫동안 인연이 있는 후인을 기다려왔지만 어느 누구도 대제의 안배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제세활빈단 사람들에 의하여 연공관이 발견되었다.
이후 제법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연공관을 드나들며 무공을 익혔지만 어느 누구도 을지혁이 남긴 글귀를 본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사용한 연공관과 이회옥이 있는 곳이 같은 연공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을지혁은 분명 무장(武將)이다. 너무도 오래되어 아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지만 그의 생전에는 그를 일컬어 용장(勇將)이며, 맹장(猛將)이었으며, 지장(智將)이었다고 하였다.
군사를 부림에 있어 나아감과 물러감이 명확해야 하고, 아랫사람들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엄격함과 부드러움을 겸비하여야 하며, 장수라 하여 학문을 게을리 하면 사람됨이 부족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을지혁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대 고구려의 혈통을 이은 후인과 인연이 있음을 알고 안배를 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이회옥은 제세활빈단원들이 사용하던 연공관과 다른 연공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른 연공관에 있는 기관 역시 강한 힘으로 석탁을 누르는 것이 기관 해제장치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려면 석탁의 상판이 바닥에 닿게하면 된다고 한 것이다.
이회옥이 다른 사람들과 다른 연공관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며칠 전에 있었던 미약한 지진 때문이었다. 덕분에 연공관 입구에 있던 진세가 흐트러졌고, 그 결과 안배가 베풀어진 연공관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전혀 짐작조차 못하는 이회옥은 너무도 정교하게 만들어진 용봉향로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중 안에 무엇이 들어 있나 궁금했다. 하여 뚜껑을 슬며시 열어보았더니 생각대로 안에는 향이 들어 있었다.
"흐음! 향로가 맞았군. 그런데 무척이나 귀중해 보이는 물건인데 이게 왜 여기서 올라오게 만들어놨지?"
용봉향로는 분명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희대의 보물이다. 하지만 재물보다는 무공에 관심이 많은 무림인에게는 그저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일 뿐이다.
만일 행로가 아니고 무림들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거궐(巨闕), 간장(干將), 어장(魚腸), 막야(莫耶)와 같은 희대의 보검이거나, 상승무공이 기록되어 있는 무공 비급이라면 사정이 많이 달라진다.
그것을 차지하기 위하여 칼부림은 물론 살인멸구도 서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봉향로는 그저 향로일 뿐이다.
그렇기에 다소 심드렁해진 이회옥은 다시 제 자리에 내려놓았다. 가져가도 좋다는 말이 어디에도 쓰여있지 않았기 때문이고 가져가라고 해도 부담스러워서 가져갈 수 없기 때문이다.
"흐음! 을지혁이라는 어르신이 남기셨다는 안배가 이건가? 가만 혹시 여기에…?"
나직이 중얼거리던 이회옥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침상 아래에 있던 화섭자(火攝子 :불붙일 때 쓰는 도구)를 가지고 왔다.
잠시 후, 연공관 내부에는 그윽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스르르 번지고 있었다.
"흐음! 졸려, 대체 왜 이렇게 졸립지? 하암! 하아아아암!"
향이 웬만큼 번지자 이회옥이 연신 하품을 하는가 싶더니 눈꺼풀이 천근만근 늘어지는 듯 자꾸만 꿈벅거리다가 스르르 쓰러졌다. 그리고는 코를 골기 시작하였다.
"드르렁! 퓨우우! 드르르르르렁! 드르렁! 퓨우! 드르르르렁!"
이곳 연공관에 든 이후 아니, 세상에 태어난 이후 이처럼 깊은 잠에 취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을 것이다. 향의 효능 때문인지 이회옥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패대기를 쳐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들며 코를 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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