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가슴 속, 변치 않는 싱그런 난초향 - <무소유>(無所有)

'소유' 아닌 '살아있음' 의 기쁨

등록 2003.07.02 13:41수정 2003.07.0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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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중학교 때였을 것이다. 성당 여름캠프에서 오후 프로그램 후 물가에 가게 되었는데 물놀이를 하고 싶으면서도 물에 옷이 젖는 것이 귀찮아서 다들 주저하면서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나도 물놀이를 하고 싶으면서도, 조금 전에 다 씻고 깨끗한 옷을 입은 상태에서 다시 물에 젖어 옷을 갈아입는 귀찮은 과정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있었다. 정말 중요한 건, 그보다 내가 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친구들과 물장난을 치고 즐겁게 노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후에 오는 약간의 귀찮음 때문에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문득 떠오른 이 몇 가지 생각으로 어린 나는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인생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든다. 진정 중요하고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도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는 많은 것을 잃고 포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외형적인 것, 부차적인 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본질적인 것들을 잊어만 가고 있다.

오늘도 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 몇 가지 화두를 던지며 나는 참으로 혼란스러워진다. 가끔 사람들이 엄청나게 북적이는 곳을 가게 되거나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부대끼며 치열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세상에 이렇듯 많은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무엇이 그들에게 저런 삶의 의지를 준 것일까 하는 신기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 우리는 발견하고 경험하기 위해서 산다고 생각한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살아가지 않는다면 결코 알 수 없었을 것들을 매일 발견하며 그 새로움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매일 이렇게 숨쉬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의 기쁨을 알고, 눈물의 아픔을 알며, 생명의 소중함을 느끼기 위해 우리는 그 치열함 속에서도 매일 이겨내며 살아가는 것이다.

삶이란 결코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리 무의미한 시간이라 여기는 순간도 자신의 의지로 숨을 쉬고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존의 의지이며 우리가 본능이라 여기는 몇 가지 욕구도 단지 태어날 때부터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닌, 우리 스스로 생의 의지가 전제되어 생겨난 것들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생명은 소중하며 눈감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발견하고 경험함은 다른 무엇을 위함이 아닌 그 자체로 즐거움이며 목표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기쁨과 슬픔, 기대와 실망,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절망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고도로 산업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재화가 넘치고 정보가 홍수를 이루며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미명아래 우리는 극도의 배금주의에 휩싸인 채 살아가고 있다.

법정이 말한 무소유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존재와 소유라는 개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에리히 프롬은 1976년에 출간한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현대 산업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있다고 주장한다.

소유에 집착하는 삶의 방식에 따른다면 더 많이 갖는 것이 더 나은 인간으로 대접받는 지름길이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의 도덕적 품성이 어떠한지,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가 아니라 누가 더 큰 자릿수의 숫자들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를 평가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는 절대평가란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숫자에 의한 상대평가만이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소유에 집착하는 한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

진정 행복해 지려면 오히려 소유가 아닌 자신의 '존재'에 집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무소유의 삶', 즉 존재를 중시하는 삶을 지향해야 하는 것이다.

소유는 무언가 가지는 것에 집착하며 온전히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유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 그 목적을 이루고 나면 그것의 가치는 없어지기에 사람들은 쉽게 가지며 그만큼 쉽게 싫증낸다.

하지만 존재의 가치는 단지 그것이 존재함에 그 의미를 가진다. 향기로운 내음의 아름다운 꽃송이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이지 그것을 꺾어 품에 안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꽃이 더 오래 그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도록, 지나가는 발걸음마다 그 생동하는 아름다움에 눈빛 한 번을 보내고, 향기 한 번을 맡으며 그렇게 그 존재 자체에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무릇 이 원리는 물질뿐만이 아니라 사람관계에서도 적용된다. 그는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 라 말한다.

우리는 오해라는 말을 대개 대인관계가 틀어졌을 때 많이 사용한다. 상대방이 나의 좋은 의도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으로 우리는 '오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말속에도 오해가 생길 수 있다. 우리가 타인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진정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러한 이해의 불완전함이 바로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의 원천이 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듯 모든 말과 인간관계를 의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외형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집착하고 구속함은 이미 서로 존재로서가 아닌 소유물로 바뀌어버린 관계이다. 너와 나, 서로 그저 믿음과 신뢰만이 존재할 뿐이지 소유함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가 아닌, 너와 내가 지금 살아있고 이렇듯 서로 눈을 바라볼 수 있는 그 자체에 희열을 느끼고 그로 인해 서로 삶이 더 충실하고 풍성해짐에 기뻐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이러한 가르침이 깨달음으로 다가오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욕심을 자극하는 것들 뿐인데, 우리는 어떻게 도둑마저 반기었던 법정 그처럼 초연히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우리는 집착이 괴로움임을 깨달아야 한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기에 어느 정도 의식주의 소유함은 인정하지만 그것 자체에 집착해서는 안 될 것이다.

큰집과 좋은 차, 멋진 옷은 목적이 아닌 단지 도구임을 알아야만 한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그에 대한 집착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겠지만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집착은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우리는 궁극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살아간다.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사이 그 행복함의 정체는 잊어버리고 만다.

행복이란 바로 '영혼의 충만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왕자는 지구에서 알약을 파는 한 장사꾼을 만나게 된다. 그 약은 갈증을 푸는데 완벽한 것이어서 한 주일에 한 알씩 먹으면 다시는 목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약을 먹음으로서 한 주일에 53분을 '절약'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53분의 시간에 우리는 주위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며 샘물로 걸어가 차가운 샘물을 달게 마실 수 있는데, 성능이 더 좋은 알약을 만들고 더 많은 시간을 '절약'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이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는 열차 안의 승객처럼 우리는 정작 중요한 것은 잊은 채 그것의 허상만을 좇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참 느낌이 새로웠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내가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때 이 책을 읽으면서 별로 어렵다는 생각도 심오한 진리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참 맑은 느낌이란 생각과 함께 마치 밥알을 씹듯이 그렇게 한줄한줄 읽어 내려 갔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신기하게도 어떤 부분은 너무 빨리 훓어내리고 어떤 부분은 왠지 모를 답답함에 몇 번이나 책을 덮으며 읽어야 했다.

왠지 공감이 안가는 느낌… 그만큼 내가 세상의 때가 묻은 것인지, 아니면 이 얇은 책 안의 내용과 내 안의 모순된 부분을 발견하며 이질감에 시달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렇게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짧다면 짧은 스물 두 해를 살아오면서 언제나 나를 괴롭혔던 것은 타인과의 관계였다.

남이 나와 같지 않음을 알면서도 항상 내 마음만큼의 기대를 했기에 그리고 그 좁혀질 수 없는 이질감에 괴로워했다. 인간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을 버릴 수 없기에 항상 불안했고 그렇게 오해를 동반한 말과 행동으로 상대를 만들었다.

법정 그의 말처럼 녹은 그 쇠를 먹듯이 그렇게 오해와 의심들은 언제나 인간관계를 퇴색시킨다. 항상 부처처럼 맑은 마음으로 살고 싶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혹시 그런 일은 사람에 부대끼지 않고 그렇게 산 속에서 자연을 벗삼는 그 같은 사람만이 가능한 게 아닌가? 우리 앞에는 온통 화려하고 욕심나는 것들뿐이고, 모두들 좀 더 영리하게 살라는데 그가 말하는 본래 무일물한 삶이 가능한 것일까?

찬란한 여름 햇살에 더욱 선명한 푸른빛을 더해 가는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듯 갈수록 의문만이 늘어가는 나를 돌아본다.

소유냐 존재냐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까치,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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