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무장이 결코 체재생존을 위한 유용한 억제력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북한은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사진은 지난해 8월 13일 촬영한 북한 영변 핵시설 위성사진.연합뉴스
최근 북한이 뉴욕 채널을 통해 미국 정부에 사용후 연료봉 재처리를 완료했다고 통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어, 재처리 진위 여부에 초미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7월 13일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 8일 뉴욕에서 미국과 실무급 비공식 접촉을 갖고 사용후 연료봉 8천개에 대한 재처리작업을 완료했다고 미국측에 통보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미국 듀크대에서 한반도 문제를 연구 중인 민주당의 장성민 전 의원이 워싱턴의 정통한 고위소식통을 통해 들은 얘기를 국내 언론에 알리면서 보도되었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정부 관계자들은 재처리의 진위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북한측이 재처리 완료를 미국측에 통보한 것은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이와 관련해 도널드 럼즈펠드 미국 국방장관은 13일(현지시간) NBC 방송과의 회견에서 "그들(북한)은 우리에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폐연료봉 재처리 속도와 관련한 주장도 함께 했다"며 북한측으로부터 재처리 관련 내용을 통보받았다고 밝혔다. 그러나 럼스펠드 장관은 "일부에서는 그들의 주장을 믿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면서 북한의 재처리 완료 진위 여부는 아직까지 확인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의도는?
북한의 재처리 여부에 대한 정보의 불확실성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공공연히 재처리 완료와 핵억제력 보유를 거론하고 있는 북한의 의도이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하루가 아쉬운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담판을 빨리 끝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시간은 우리편"이라며, 북한과의 진지한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서 핵문제를 빌미로 미사일방어체제(MD) 구축 등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는 부시 행정부와는 달리, 북한은 극심한 경제난과 점차 조여오는 미국의 봉쇄망 및 선제공격 위협으로 체제위기가 가중되면서 하루라도 빨리 미국과의 협상을 마무리짓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최근 다자회담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이는 한편, 재처리 완료와 핵억제력 보유 의사를 밝힘으로써, '조기에 협상을 마무리하든지, 우리의 핵무장을 받아들이든지 양자택일하라'는 식으로 미국을 압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최근 행태는 지난 4월말 베이징 3자 회담을 앞두고 외무성 대변인이 "폐연료봉 8천여 개의 재처리작업이 '마지막 단계'에서 성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밝힌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이러한 전례를 볼 때, 북한이 재처리 및 핵억제력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다자회담을 수용하기에 앞서 유리한 협상 국면을 조성하기 위한 의도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또한 미국이 진지한 자세로 협상에 나설 경우 조기에 핵문제가 풀릴 수도 있다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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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의 실패'에 대한 대비
그러나 이러한 북한의 양면 전략에 미국이 호응하고 나올 가능성이 극히 낮은 것이 현실이다. 북한의 선(先) 핵폐기가 전제되지 않은 협상을 "북한의 협박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온 부시 행정부는 오히려 북한의 재처리 완료 통보나 핵억제력 보유 의사에 대해 북한의 핵카드는 협상용이 아니라 실제로 핵무기를 보유하고자 하는데 있다는 인식을 더욱 강화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중앙정보국(CIA)이 북한의 본질적인 목적이 핵억제력 확보에 있다고 정보평가를 내린 것도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미국 내에서 벌써부터 '외교의 실패'를 운운하면서 무력 사용을 비롯한 강경책이 논의되고 있는 것도 심상치 않은 대목이다.
이러한 부시 행정부의 강경책은 역설적으로 북한에게도 '외교의 실패'에 대비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바로 핵억제력 발언이 내포하고 있는 북한의 두 번째 의도이자, 가장 주목해야 할 문제이다.
생존을 위한 '기회의 창'이 될 것으로 믿었던 제네바 합의가 '배신의 늪'이 된 상황에서, 부시 행정부가 대북한 비타협주의를 고수하면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핵선제공격을 포함한 선제공격 전략을 구체화하고 있는 현실에서, 미국이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명확한 증거도 없이 이라크 침략전쟁을 강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억제할 수 있는 핵무장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히 다자회담을 미국의 시간끌기 및 대북한 공격의 명분 축적용으로 보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다자회담이든 양자회담이든 '외교의 실패'에 대비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회담의 실패가 미국에게는 대북한 무력 사용의 조건이 될 수 있는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핵억제력으로 안전 담보 받을 수 없어
북한이 미국에 갖고 있는 불안감과 배신감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핵무장이 결코 체재생존을 위한 유용한 억제력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북한은 하루빨리 깨달아야 한다. 즉, 핵무장이 북한 자신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북한이 공식적인 핵보유국이 될 경우에, 미국 주도의 경제제재와 봉쇄, 그리고 고립화의 수준은 지금보다 훨씬 높아질 수밖에 없고, 북한의 핵무장 방지를 사활적인 이해로 삼고 있는 남한과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됨으로써 붕괴의 위험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북한 체제 위기의 원인이 미국의 안보위협 못지 않게 경제위기 탓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핵무장은 체제생존을 위한 '탈출구'가 아니라 체제붕괴의 '가속기'가 될 것이라는 점을 북한은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 지도부는 '제2의 고난의 행군'을 강행하는 한이 있더라도, 핵무장을 통해 미국의 선제공격을 막는 것이 체제생존의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아무리 미국이라고 하더라도 '핵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선제공격을 쉽게 감행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대를 북한 지도부는 가지고 있고, 이는 일정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핵무장이 북한에게 유용한 억제력을 제공할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우선 현대전에서 핵무기가 실질적인 억제 효과를 갖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핵무기를 탄도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소형 핵탄두 제조 기술의 확보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의 선제공격에 의해 핵무기가 파괴되어도 보복공격을 할 수 있는 '여분의 핵무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둘 모두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돈과 첨단 기술, 그리고 오랜 시간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북한이 희망하는 대로 핵억제력을 갖는 것은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미국이 북한의 실질적인 핵무기 보유 이전에 선제공격을 단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뿐더러, 미국의 군사력과 군사전략이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에 대해서도 '선제공격'을 적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형되고 있고 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특히 북한이 한-미-일 삼각 군사협력체제에 맞서 군비경쟁을 불사한다는 것은 북한 자신에게도 재앙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이미 '북한위협론'을 명분으로 군비증강 및 동맹체제 강화에 나서고 있는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는 북한의 핵무장이 가시화될 경우, 그 속도를 훨씬 높일 것이다.
여기에는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MD와 지하요새 파괴용 소형 핵탄두 등 신형무기를 비롯한 군사력 증강과 선제공격을 구체화하는 작전계획 수립 등이 포함될 것이다. 2002년도 GDP가 약 200억 달러에 불과한 북한이 군사비만으로도 북한 GDP의 20배에 달하는 약 4000억달러 이상을 지출하고 있는 한-미-일 삼각 협력체제에 맞서 군비경쟁을 벌인다는 것은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가랑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핵무기가 없는 북한은 일단 '몇 개'라도 핵무기를 보유하면 미국의 선제공격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지만, 이는 핵군비경쟁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의 반영이다. 적대 국가인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면 한-미-일 삼각체제는 북한의 핵무기고(庫)를 최우선적인 파괴 대상으로 삼을 것이고, 이에 불안을 느낀 북한은 핵무기와 미사일의 양을 늘리려 할 것이다.
북한이 스스로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의 핵무기 보유는 핵무장 자체가 갖고 있는 안보 딜레마의 속성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군비경쟁의 늪에 빠지면 그 결과는 자명해진다. 미국에 의해서든 북한에 의해서든 한반도는 끊임없는 핵전쟁의 공포에 시달릴 수밖에 없고, 북한은 첨예한 군비경쟁의 결과로 체제 붕괴의 위험성이 더욱 높아지게 될 수밖에 없다.
남한과 중국이 다자회담 성사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이 때에, 북한의 핵 시위 강화는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세력들의 입지를 약화시킬 뿐이다. 오늘날 한반도 위기와 관련해 논리와 명분, 그리고 문제 해결 방안에서 북한은 결코 미국에게 밀리지 않는다.
핵 억제력에 대한 환상을 쫓기보다는 다자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해, 문제 해결방안을 적극적으로 내놓으며 정치적 억제력을 확보해나가는 것이 북한 자신에게도 비교우위에 있다는 점을 하루빨리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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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네트워크 대표와 한겨레평화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관심 분야는 북한, 평화, 통일, 군축, 북한인권, 비핵화와 평화체제, 국제문제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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