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표지여성신문사
이 책은 여성주의 시각으로 한국의 근대사를 다시 쓰고 있다. 여성주의 시각으로 쓴다고 해서 여성에 관한, 혹은 여성을 미화하는 역사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글쓴이들 스스로 그런 함정을 지적하고 있다.
"대중화된 페미니스트 조직이 없었던 무렵에, 특정한 자원에 접근 가능했던 '엘리트 여성'의 행위성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은 저항 자체의 계급적 분석을 결여한 채 특정한 여성들의 역사만을 강조하는 함정을 갖고 있는 것이다"(8쪽).
그러면서 글쓴이들은 한가지 포부를 밝히고 있다. 여성의 다양한 경험을 획일화시키지 않고 의미화하기 위해
"기존의 역사가 어떤 경로를 통해 남성의 역사로 상징되어왔는지, 역사가들이 상징 권력과 지식 생산의 과정에서 어떻게 특정하게 선택된 사실을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출발"(9쪽)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 | | 글쓴이 소개 | | | | <길밖세상>은 여성사를 공부하는 젊은 연구자들의 모임이다. 권김현영: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과정 수료 박정애: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박사과정 소현숙: 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이상록: 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전은정: 서강대 사회학과 석사 졸업 정미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석사 졸업 | | | | |
그 비판의식을 바탕으로 이 책은 근대 여성교육, 일제시대 공창제, 직업 여성의 등장, 근우회, 기생, 1931년 평원고무공장 파업, 1950년대의 전쟁 미망인 문제, 가족법 개정운동, 가족계획, 부녀 새마을운동, 1976년 동일방직 여성노동자 파업, 결혼퇴직제, 성고문사건, 군'위안부', 윤금이살해사건, 김영오 성폭력사건, 서울대 신교수 성희롱사건,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벌, 황혼이혼, 영 페미니스트, 사이버 성폭력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단순히 빛 바랜 과거의 기억을 뒤적거리는 게 아니라 아직도 그 억압된 기억이 우리 현실에 깊이 뿌리내려 있음을 지적한다.
책에서 얘기되는 그 많은 사건을 일일이 얘기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직접 읽어봐야 그 미시적인 사건들이 갖는 구체적인 현실적 함의를 알 수 있다. 그래서 사건 자체보다 그 사건들을 관통하고 있는 '관점'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사실 역사가들이 기록한 역사를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여성주의 쪽에서만 제기한 것이 아니다. 역사가는 자신의 환경과 시대에서 자유롭지 않고 사건을 채취하고 가공하는 과정 역시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그래서 프랑스의 역사가 마르크 블로흐는
"역사는 시계 제조업도, 고급가구 세공업도 아니다. 그것은 더 나은 이해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이다. 따라서 그것은 움직이는 그 무엇이다. 하나의 학문을 그것이 만들어지는 대로 묘사하는 것으로 한정한다면 어느 정도는 늘 그것을 왜곡하게 될 것이다. 더욱 더 중요한 것은 그 학문이 어떤 모습으로 형성되기를 바라는지 말하는 일이다"(<역사를 위한 변명>, 33쪽)라고 얘기한다.
글쓴이들은 역사가 어떤 모습을 가지길 원할까? 그리고 그 생각은 기존의 남성중심적 역사관과 어떻게 다를까? 글쓴이들이 얘기하는 그 상은 그리 분명하지 않다. 글쓴이들은
"사건을 사건이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것을 비정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어떤 질서들에 의해서인데, 우리는 그것을 일상의 성별정치학이라고 이름 붙였다.…역사란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닌, 입장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며 그것들이 서로 경합하는 담론 투쟁의 장임을 드러낼 수 있었다"(11쪽)고 얘기한다. 이 말 자체에서는 여성주의만의 독특한, 혹은 대안적인 시각을 엿볼 수 없다.
무조건 기존의 담론을 극복하고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르게 바라보고 다르게 생각하며 다른 것을 꿈꾼다는 것은 부정만이 아니라 어떤 긍정의 것을 생성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 사건에서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는 인과성을 찾으려면 단편적인 서술에서 벗어나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한다.
여성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빼면(물론 이 주제 자체가 중요한 것이지만) 어떤 일관된 흐름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 명이 쓴 책이 아니고 글쓴이들의 입장도 각자 다를 수 있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여성주의가 바라는 역사의 관점을 세우는 작업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도로테 비얼링(Dorothee Wierling)은 남녀의 양성사(Genusgeschichte)를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여성역사가들도 역시 우리 자신의 실제연구에서 대부분 양성사에 대한 요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주로 여성사를 추진하고 있다(나 자신의 하녀에 대한 연구가 한 예이다). 그로 인해 '성(Geschlect)'은 여성적인 것이고, 따라서 남성사의 보편성과 성 중립성에 대한 요구는 전혀 위협당할 필요가 없다는 인상이 강화되고 있다…과연 우리는 하나의 성으로서 남성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는가? 다른 한편으로 여성사를 추진하는 것은 정당할 뿐만 아니라 양성 간의 구별, 비교 그리고 관계를 지향하는 양성사를 위해 필수적 전제이다"(<일상사란 무엇인가>, 236쪽).
"양성사로 확대된 여성과 남성, 그리고 그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역사는 실제로 양성(Geschlechter)의 일상 속에서 특히 잘 연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상이란 남성과 여성이 주체로서 그 관계들, 그리고 관계의 의미를 그들의 전체 생활방식과 문화와 연결하여 계속해서 '협상'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거기에는 또한 남성이라는 것과 여성이라는 것이 가지는 존재형태의 다양함이 나타나기도 한다. 따라서 일상은 모두 상투적인 것 저편의, 하나의 풍요한 장이다"(같은 책, 239쪽). 한번쯤 고민해 봐야할 얘기가 아닐까?
이제 막 걸음을 떼려 하는데 나무라며 길을 막고 설 생각은 없다. '여성사건사'에서 '여성사'로 나가는 그런 큰 걸음을 기대해 본다.
20세기 여성 사건사
길밖세상 지음,
여성신문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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