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고도 누가 살고 있네

주금산 골짜기의 물과 숲이 아이들을 말없이 가르쳤다

등록 2003.07.26 17:56수정 2003.07.2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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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금산 골짜기를 민들레(화광중 생태환경 동아리) 아이들과 찾았다.
몽골 문화촌 가상이에 뛰어 다니는 말을 신기하게 보던 아이들은 산으로 오른다는 말에 얼굴부터 찡그린다.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아직 멀었냐고 묻는다.


몇 해 전 큰 비에 엉망이 된 골짜기는 아직 제자리를 못 잡고 있다. 행락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들이 악취를 풍긴다. 어쩌면 아이들의 부모들일지도 모를 이들이 버린 것들이지만 아이들은 그것을 치우자는 말에 질겁을 하여 뒤로 물러선다.

조금 지나니 산길 가상이에 돼지풀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몇 해 전 외국에서 사료를 따라 묻어 들어온 돼지풀이 이렇게 깊은 산자락까지 자리잡아 주인 행세를 한다. 그 곳을 지나자 길 위에 다람쥐 한 마리가 차에 치어 죽어 있었다. 이렇게 깊은 골짜기에 숨어 살면서, 설마 차에 치어 죽을 줄은 몰랐으리라.

가파른 고개를 넘으니 제법 물소리가 시원한 비금 골짜기가 나타난다. 물을 보고 아이들은 환호성부터 지른다. 바위에 걸터앉아 간식부터 푼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놀이는 먹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어디를 놀러간다면 바리바리 먹을 것부터 싸들고 가서, 골짜기 가득 고기 굽는 연기로 자욱하게 만드는 어른들이 가르친 가정교육 탓이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재미있는 보물찾기를 제안한다. 이 골짜기에서 살아 있는 무엇이나, 흔적을 찾아 보는 것이다. 깃털이든, 물 밑에 숨은 벌레이든… 아이들은 주변을 휘익 둘러보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시큰둥한다.

가장 귀한 보물을 찾은 사람에게는 상품을 준다는 말에서야 와르르 떼를 지어 주변을 뒤진다. 무엇이든 경품을 걸고 물건을 팔아먹은 우리 어른들의 상술이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아마 그 상품이 <야생초 편지>라는 책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아이들은 어떤 얼굴을 할까.


그러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말없는 숲과 골짜기이다. 아이들은 이내 진지해지며, 물 밑의 돌을 뒤집어 흡사 나뭇잎 같은 물벌레 짚을 찾아낸다. 나뭇잎을 돌돌 말아 그 안에 숨은 물벌레가 아이들의 손을 피해 게처럼 기어 다니는 것을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놓칠 리가 없다.

"이것 보세요" 물벌레가 붙은 조약돌을 집어 들고 달려온다. 타다 만 나무 등걸을 들고온 다혜, 물에 떨어진 채 오랜 시간 물에 씻겨져 질긴 엽맥만 망사처럼 남겨 놓은 떡갈나무 잎을 집어 들고 온 재완이. 그리고 좀더 윗쪽으로 올라간 사내 아이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골짜기 돌 사이로 떨어지는 작은 폭포 뒤에 숨겨진 물까마귀 새끼를 발견한 것이다. 대단하다. 머리를 디밀고 바라보아도 겨우 노란 부리만 손끝처럼 내보이는 새둥지를 어떻게 찾아냈을까. 다급해진 어미새는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아이들을 홀려낸다.

둥지에 손을 못 대게 말하기도 전에 벌써 어미 새는 아이들 손에 잡힐 듯 낮게 나르며, 아이들을 둥지로부터 멀리 꼬여내 단숨에 먼 곳까지 데려간다. 아이들은 당장은 모르겠지만, 언젠가는 자연과 생명이 지닌 모성의 지혜를 깨우치게 되리라. 자연의 가르침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아이들이 살아갈 먼 훗날을 보며, 그렇게 가르치나 보다.

이형덕

이형덕

이 모두가 보물인 것을 아이들이 알게 되기 바란다
이 모두가 보물인 것을 아이들이 알게 되기 바란다이형덕
조금 있자니, 진지한 효선이가 나뭇잎에 물을 받아 어린 도룡뇽을 데려온다. 어리광쟁이 지혜도 물 속에서 이리저리 오가는 버들치를 찾아냈다. 상품을 받겠다고 그걸 움키려는 지혜에게 그것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 물으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가 찾은 보물을 바라보기만 한다.

살아 있는 것. 가져가지 않고, 소유하지 않으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 자연은 그렇게 아이들을 가르치나 보다. 우리말고도 이 골짜기에 많은 게 살고 있다는 어느 아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들은 이차방정식보다 더 중요한 지혜를 스스로 터득했다.

푸른 숲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동요 소리를 들어 보셨습니까
푸른 숲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동요 소리를 들어 보셨습니까이형덕
나무 그늘에 앉아 가시내들은 간식을 나눠 먹는다. 친구 입에 과자를 넣어 주고, 반토막은 자기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맑은 물에 발을 담근 아이들의 입에서 동요가 나온다. 내가 어린 시절 듣던 '나뭇잎 배'라는 동요를 아느냐고 묻자, 안다고 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나는 나지막히 그 슬프고도 아름답던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래된 동요를 아는 아이들이 신기하여, '섬그늘'이라는 동요를 아느냐고 묻자, 아이들은 대번에 노래를 흥얼거린다. 그런데, 가사가 좀 이상하다.

엄마가 캬바레에 춤 추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담배 피다가…

머리가 아찔해진다. 허위적거리며 부르지 말라고 했더니 아이들은 그런 내가 더 재밌는지 소리 높여 부른다. 그냥 재미로 부른다고 하지만, 고쳐 부르는 노랫말이 너무 현실적이고, 풍자적이다. 아이들은 우리 동요는 슬프다고 하면서도 이내 나무 그늘에 옹기종기 모여 '나뭇잎 배'를 부른다.

푸르른 나무 그늘 아래,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나지막히 동요를 부르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는 홀려 버렸다. 효선이는 벌써 나뭇잎을 주워, 배를 만들고 있다. 아이가 띄워 보내는 저 배는 어디로 갈까.

냇물아, 흘러 흘러 어디로 가니

희미해지는 노랫말 가운데서 홀연히 그 가락이 되살아난다.

우리들 마음 속에는 여전히 나뭇잎 배가 떠 다니고 있다
우리들 마음 속에는 여전히 나뭇잎 배가 떠 다니고 있다이형덕
동요를 부르는 가시내들 곁에서 머슴아들은 벌써 물놀이에 한창이다. 누군가 한 명이 뛰어들자, 꼬리를 잇는다. 그만 두라고 하려다 온종일 교실과 학원을 오가면 딱딱한 의자에 붙들려 있던 아이들을 떠올리곤 놓아 둔다. 물놀이도 그못지 않은 공부이다.

그렇게 물과 친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먼훗날 자기의 아이들과 제자들에게 그가 보낸 이 골짜기의 여름과 놀이를 전해줄 수 있다면 그것도 훌륭한 공부이다.

물과 친해질 수 있는 놀이도 훌륭한 공부이다
물과 친해질 수 있는 놀이도 훌륭한 공부이다이형덕
초여름의 볕은 물장구를 치느라 흠뻑 젖은 아이들의 옷을 단숨에 말려 놓았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옷은 세탁소에서만 말리는 거라 알던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이 되었으리라. 자기들이 남긴 쓰레기를 말없이 주워 담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잔소리없이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연이라는 스승에 머리를 숙인다.

수업 시간에도 제멋대로 돌아다니느라 꾸중을 자주 듣던 지혜가 소매를 잡아 끈다. 은박지를 비비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온다. 메뚜기도 우나요. 아이의 손가락을 따라 가보니, 메뚜기 한 마리가 잎사귀에 매달려 열심히 뒷다리로 날개를 비벼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 있다.

그 작은 생명이 울려내는 소리치고는 참으로 청아하고 당당하다. 어리광쟁이로만 아는 지혜도 저렇게 열심히 자기 삶을 아름답고 당당한 노래로 만들어내리라 믿는다.

이 작은 숲 속의 음악 선생님
이 작은 숲 속의 음악 선생님이형덕
저마다 주워 든 보물을 디밀며, 상품이 뭐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말없이 웃어 보인다. 너희들은 이미 무엇보다 소중한 상품들을 받았단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이들은 자신들이 받은 상품을 알게 될 것이다.

이 작은 아이들이 오래도록 이 숲과 골짜기를 지켜 주기를 바란다
이 작은 아이들이 오래도록 이 숲과 골짜기를 지켜 주기를 바란다이형덕
푸른 나무 그늘이 흐르는 맑은 물에 발을 담그고 동요를 부르던 아이들을 보며, 내가 오래도록 잊고 지내던 지난 날의 기억과 그때 부르던 '나뭇잎 배'의 아름다움을 되살린 것처럼, 아이들은 언젠가 그들이 이 골짜기에서 받은 아름다운 상품을 되살려 낼 것이다.

아이들이 언젠가 연어처럼 이 골짜기를 되짚어 오기를 바란다
아이들이 언젠가 연어처럼 이 골짜기를 되짚어 오기를 바란다이형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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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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