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으음…!"
"흠! 어떤가? 죽어 마땅한 자들이 너무 많은가?"
"으음! 정말 많군요."
조목조목 무슨 죄를 지었는지가 기록된 것을 살피던 이회옥은 나직한 신음을 토했다. 반도 채 보지 않았건만 그 수효가 무려 수백에 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냥 넘긴 책장 사이로 언뜻 본 것 중에는 한 사람의 명호가 아닌 어떤 집단의 명칭도 있었다.
예를 들어 '선무서당 당주회'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집단에 속한 각 서당의 당주와 부당주들 가운데 반 이상이 제거대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분명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흉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척살 당해야 하는 이유는 건전한 보수가 아닌 수구집단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자신들이 취한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견강부회(牽强附會)을 일삼고, 온갖 패악(悖惡)을 저지르는 집단이니 한시바삐 처리해야 할 것이라 하였다.
만일 호생지덕을 발휘하여 이들의 목숨은 살려두려 한다면 다시는 권력 근처에 접근할 수 없도록 가능한 멀리 유배 보내야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을 관리 감독하는 수학당(修學堂) 소속 제자들 가운데 상당수를 시급히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분류해놓고 있었다.
이들은 진주회(晉州會)와 울사대회(亐査帶會)에 가입한 제자들로 단 하나도 살려두지 말고 모조리 참수형에 처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취한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온갖 음모를 꾸미기에 후학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 하였는데 근본이 잘못되어 있다면 마땅히 손을 봐야 하는데 그들이 건재하는 한 정상적인 교육이 어려워진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따라서 흉악한 죄를 범한 것은 아니지만 선무곡의 미래가 점점 더 암울해지기 전에 처치해야할 것이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곡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제자들도 상당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얼마나 광범위한 범위인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들은 직위를 이용한 뇌물 수수나, 권력을 이용한 각종 불법행위, 그리고 임무태만 등의 죄를 짓고 있다고 되어있었다.
명부에 기록된 대로라면 선무곡은 썩을 대로 썩은 문파이며, 희망이 없는 문파이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안 썩은 데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이 집중되면 될수록, 그리고 상층부로 가면 갈수록 오염도가 더욱 심화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문제가 되는 집단은 곡규를 새로 제정하거나 곡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장로회의였다.
그들 가운데 청렴결백(淸廉潔白)하며, 진실로 곡의 진로를 고심하는 장로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아예 장로회의 자체를 말살시키는 편이 곡을 위해 좋은 일이라고 되어있었다. 다시 말해 선무곡의 장로들 대부분을 죽여 없애야 곡의 미래가 발전된다는 것이다.
'악인록 권일'의 경우 무림천자성은 온건파인 제일호법 무영혈편 조경지를 제외한 수뇌부 전원이 척살 대상이었다. 만일 이들 모두를 척살한다면 무림은 일대 파란에 잠기게 될 것이다.
선무곡도 마찬가지였다.
'악인록 권이'에 기록된 모든 악인들을 척살해버리면 수뇌부 가운데 구 할 이상이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졸지에 권력 공백이 생기게 되어 극도의 혼란이 야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악인록에는 혼란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썩은 부위를 과감하게 도려내야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대목을 가장 명료하게 표현한 것은 '고름은 결코 살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회옥은 이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옳은 말이기 때문이다.
"허허허! 이제 천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선무곡의 미래를 위해 제세활빈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이네. 이제부턴 자네가 단주이니 진아와 상의하여 대소사를 처리토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하지만 소생이 잘해낼 수 있을지…?"
대답은 하였지만 이회옥은 왠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제세활빈단의 단주직을 수행한다 함은 악인들을 제거함으로서 정의를 수호하는데 앞장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무림천자성이 전 무림을 상대로 정의를 구현하겠다고 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정의라는 이름 하에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다 보면 무림천자성처럼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제세활빈단은 만약을 대비하여 철저한 점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자신과 연락을 주고받는 사람이 아니면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되어 있다. 단주였던 일타홍 역시 수뇌부 몇의 신원 이외에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하였다.
이것은 잘못될 경우 통제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수뇌부에서 알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찝찝한 기분이 든 것이다.
또한 살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었다.
화담은 이회옥의 얼굴을 보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허허!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강 짐작이 가네. 아마도 자네는 한 번도 살인한 경험이 없을 것이네. 그러니 꺼려지는 것이 당연하지. 충분히 이해하네. 아마 노부라도 그럴 것이네. 그런데 설마 악인록에 기록된 대로 할 생각은 아니겠지?"
"예에…? 무슨 말씀이신지요?"
악인록을 줘놓고 거기 기록된 대로 하지 말라는 듯한 느낌 때문에 반문한 것이다.
"허허! 악인록을 작성한 단원들은 피가 끓는 열혈 청년들이지. 다시 말해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혈기왕성한 청년들이 작성한 것이라네. 따라서 표현이 다소 격앙되어 있지. 옮겨 적으면서 우리가 손을 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현장의 생생함이 반감될 듯하여 보내온 밀지의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네."
"으음……!"
"이제부터는 자네가 단주이네. 선조께서 예언하신 대로 우리 선무곡을 위하여 큰일을 해주기 바라네. 그리고 악인록은 참고 자료일 뿐이네. 자네는 거기에 기록된 죄목이 사실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여야 할 것이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악인은 당연히 지옥으로 보내야겠지만 억울한 피해를 당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네. 일단 죄가 확인되면 그들을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를 결정하게. 그게 자네의 권한일세."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이회옥은 화담의 말에 잠시 마음이 놓이는 듯하였다. 엄청난 살상을 하지 않아도 될 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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