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박철! 너 안 서?"

건망증으로 인한 실수담 이야기 (5)

등록 2003.08.01 08:43수정 2003.08.01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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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릿느릿 박철
한겨울 창 밖으로 칼바람이 소리를 내며 스칠 때였다. 아내와는 냉전 중이었다.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은 고성이 오고가고 육박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자못 심각했다. 슬몃슬몃 애들 눈치 보아가면서 시간을 끌다가 저녁 무렵, 싸움의 기세가 조금 시들어지면서 피차 아무 말이 없다. 집안 분위기는 살얼음판이다. 아이들까지 조용하다.


나는 아내와 싸울 때 아내가 연약한 여자이므로 힘의 균형을 맞추어 싸움의 수위를 조절한다. 그래서 화가 폭발할 지경이지만, 속으로 분을 삭인다. 반면 아내는 자기가 약자라고 생각하는지, 밀리면 진다고 생각하는지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덤빈다. 사생결단할 태세이다.

아침이다. 여전히 겨울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마음은 차분해졌지만, 싸움의 후유증이 남아 있어 마음 한 구석이 찜찜하다. 내가 아내에게 너무 심했다는 생각도 들고,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 자책감이 몰려든다. 아내는 아침밥을 줄 생각도 안 한다. 예상했던 바다. 아마 일주일동안 아무 말도 안 할 것이다.

나는 밖에 나가 군불을 지핀다. 이럴 때에는 무심하게 부엌에 나가 군불을 지피면 마음이 차분하게 정리가 된다. 탁탁 소리를 내며 참나무 장작에 불꽃이 튄다. 그렇게 한참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찾는다.
“여보, 여보! 큰일 났어요. 애들이 열이 너무 심하고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요.”

내가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두 녀석 머리에 손을 얹었더니 열이 심하다. 체온계로 열을 재어 보았더니 두 녀석 모두 38도에 가깝다. 입을 벌리고 목젖을 보았더니 편도선이 심하게 부어올랐다. 감기에 걸린 것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병원엘 가야겠다 싶어 외출차비를 한다. 아내는 아이들 옷을 입히면서도 여전히 아무 말이 없다.

느릿느릿 박철
겨울바람보다 더 차가운 바람이 방안에 가득하다. 두 녀석을 오토바이 뒤꽁무니에 태우고 담요로 뒤집어씌운다. 오토바이 외에는 다른 교통수단이 없다. 아내가 오토바이 맨 뒤에 타고 아이들을 붙잡는다. 길이 미끄럽다. 중간 중간 잔설이 녹아 빙판이 된 길은 여간 미끄러운 것이 아니다. 아내에게 어느 병원을 갈 거냐고 물었다. 헬멧을 써서 대답 소리가 잘 안 들린다. 새로 생긴 병원으로 가자고 하는 것 같다.


오토바이를 타고 조심해서 남양 읍내까지 나가는데, 아내한테도 미안하고 애들한테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병원에 갔다가 오는 길에 돼지갈비라도 사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주머니에 감신대학교 채플에서 설교하고 받은 일금 십 만원이 그대로 있었다. 돼지갈비를 맛있게 먹으면서 화해를 할 생각을 했다.

바람은 차지만, 날씨는 말끔했다. 남양읍내를 지나 새로 개원한 종합병원 입구에 도착해서 오토바이를 세웠다. 발을 땅에 디디고 아내가 아이들을 오토바이에서 내릴 동안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 움직임이 없다.


‘아니, 이 여자가 뭐 하느라고 꾸물거리는 거야?’ 하고 뒤를 돌아보니 담요로 덮여있는 두 아들 녀석만 있고 아내는 없지 않은가? 이상하다 싶어 아딧줄에게 “엄마 어디 갔냐?”고 물었다.
“아빠가 엄마 태우지 않았잖아요. 아빠가 우리만 태우고 출발해서 엄마가 막 소리 질렀어요.”
“뭐! 뭐라고 소리를 질렀는데?”
“'야, 박철! 너 안서?'하고요."

공연히 부아가 치민다. ‘아니 애들은 태웠으면 얼른 올라타야지. 그렇게 동작이 둔해서 어디다 써먹어. 오토바이 지나간 다음에 세우라고 소리를 질러?’ 아내와의 화해는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말았다. 애들을 데리고 소아과에 가서 치료를 받고 집에 갔더니, 아내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 내가 이불을 걷어내고 말을 건넨다.
“일어나봐. 아니 오토바이를 얼른 타야지. 나는 탄 줄 알았잖아!”

아내는 입을 일자로 다물고 아무 말도 안하고 밥을 차려준다. 김장김치에 밥 한 공기, 보아하니 건성으로 차려준 밥상인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나와 두 아들 녀석이 밥을 물에 말아 몇 숟갈 뜨고 있는데 저만치 구석에 앉아 있던 아내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더니 방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웃어댄다. 벙어리가 된 줄 알았더니 말까지 한다.

느릿느릿 박철
“…아이고, 아이고, 그래 나는 안태우고 애들만 태우고 내빼요? 그렇게 신경이 둔한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야!”

건망증인가 멍청해서 그런 것인가? 아내가 데굴데굴 구를 만큼 웃기는 일인가? 아니면 아내가 나와 화해하려고 쇼를 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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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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