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에 풀이 없으면 이 '소깨잘'이나 '고마니대'를 대신 베어다 줬습니다. 과자처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김규환
여섯 살부터 갈고 닦은 내 낫질 솜씨...소 꼴 베는 건 어머니와 자식들 몫
여섯 살 때부터 꼴을 베었으니 내 꼴 베는 솜씨도 보통은 아니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 이미 3년에, 이제 2학년이니 낫질이 벌써 5년째다. 잘 든 낫으로 춤도 출 수 있었다. 돌부리만 만나지 않으면 눈감고도 쓱싹쓱싹 흙 한 줌 들어가지 않게 가지런히 좋은 풀만 골라 벨 수 있는 실력을 갖춘 것이다.
이 때 어지간한 아이라면 놀기 바쁠 테지만 우리 마을에서는 나를 포함한 절반 이상은 어른들 대신 소먹일 풀을 베어와야 했다. 황소를 기르는 집은 그래도 덜 했지만 암소가 송아지라도 한 마리 낳는 날에는 소 풀의 양은 감당하기 힘겹게 늘어만 갔다.
어른들은 퇴비 만들 풋나무를 해오는 게 일이었으니 소먹이는 것은 아녀자 몫이었다. 간혹 여유가 있으시거나 상황이 급할 때만 거들어 주는 정도였다.
일의 양으로만 보면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겐 강제노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똘망똘망 곧 튀어나올 것 같은 착한 눈을 가진 소를 보면 ‘얼른 자라서 우리 집 부자 되게 해 주라~’며 더 열심히 베어 왔다.
집으로 가져와서는 꼴 망태 집어 던지고 그냥 집 밖으로 나가 놀지도 않았다. 꼴 청에 있던 작두 날이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도 물기를 가득 먹어 녹이 탱탱 슬어 있다. 작두로 몽글게 썰어두고서 잠시 휴식 취할 요량으로 동네 한 바퀴 돌고 오는 게 일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