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핫! 만천과해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었네."
왕구명은 모든 문도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있는 것이 흡족하다는 듯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동안 갈고 닦은 것을 마음껏 뽐낼 마당이 활짝 펼쳐져 있는 셈이니 왜 안 기쁘겠는가!
후한(後漢) 말엽 황건적의 난으로 천하가 어지러울 당시 관해(管亥)가 인솔한 황건적들이 북해성(北海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북해성의 태수(太守)는 공융(孔融)이었는데 현명하긴 했으나 군에 관한 한 문외한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북해에는 태사자(太史慈)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노모를 태수 공융이 돌보아 주고 있었다. 이에 태사자는 은혜를 갚기 위해 공융에게 나아갔다. 공융은 그에게 평원(平原)의 유비(劉備)에게 도움을 청할 것을 원했다.
태사자는 이에 응하고 성루에 올라가 포위를 빠져나갈 생각을 했다. 계책을 생각해 낸 태사자는 완전 무장을 하고 수행원 두 명과 성밖으로 나갔다.
황건적을 이를 보고 진열을 정비하고 무기를 챙겼다.
태사자는 두 명의 수행원에게 양쪽으로 가서 화살 과녁을 세우라고 했다. 그리고는 말을 몰아 황건적 진지를 향해 질주하다가 양옆의 과녁을 향해 각기 세 발씩의 화살을 쏘고는 말을 돌려 성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둘째 날도 그렇게 했고, 셋째 날도 역시 그러했다.
넷째 날이 되어 성문이 열리자 황건적 진지에서는 오늘도 화살을 쏘겠거니 하고 아무런 경계도 하지 않았다.
이를 본 태사자는 화살을 쏘는 대신 힘껏 고삐를 당기고 그대로 황건적의 진지를 가로질러 달려갔다. 뒤늦게야 황건적이 추격했지만 이미 태사자는 진영을 벗어난 후였다.
태사자는 무사히 평원에 도착해 북해성의 위기를 알렸고, 유비는 3천명의 병사로 북해성을 구하도록 했다.
"핫핫! 이런게 바로 만천과해라 할 수 있는 거지. 그동안 우리가 공격하는 척하다 물러난 것도 이것 때문이었지. 알겠는가?"
"……!"
정의문도들은 대답대신 입을 벌린 채 왕구명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처럼 유식해질 수 있을까 존경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정의문에 속하기 전에는 깊은 산중에서 지나가는 행인이나 털던 산적들이었으니 유식하면 이상할 것이다.
"호호! 만천과해에 대해서 잘 들었지요? 그러니까 진짜 공격을 해야 합니다. 광견당은 배후로 잠입하면서 불을 지르되 절대 곳간에는 불을 지르면 안 되요. 양민들에게 나눠줘야 할 테니…"
"알고 있습니다. 문주!"
산해관에 당도한 이후 협도당은 오십여 차례에 걸쳐 기원이나 전장 등을 털어 굶주림에 신음하는 양민들을 구휼하였다. 물론 노회(老獪)한 혈면귀수를 무천장 밖으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혈면귀수는 한번도 무천장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색에 푹 빠져있느라 다른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 사이 일지매 여옥혜는 살아있는 전설이 되어 버렸다.
그녀 덕분에 굶어죽었을 목숨을 구했기에 사람들은 그녀를 야래향이라고도 불렀지만 생미륵(生彌勒)이라고도 불렀다.
"총관과 맹호당은 혼잡한 틈을 타 정면을 치고 들어와 소란을 피우세요. 그 사이에 놈을 잡겠어요."
"문주님! 속하, 외람되지만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하세요."
여옥혜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선 탑탁호골 좌비직을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에게 패했을 때 한낱 계집에게 진 것이 너무도 분하다는 듯 스스로 두개골을 쪼개려 했었다.
이에 여옥혜는 사내의 몸으로 계집에게 패한 것이 부끄러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후세에 그 이름이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이 말을 들은 좌비직은 겉으로는 화를 내는 척하였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이날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도전할 것이라는 말을 하고 고집을 꺾었다. 그리고는 정말 열심히 무공 수련에 임하였다.
새벽에 가장 먼저 연무장에 나왔고, 가장 열심히, 그리고 가장 늦게까지 무공 연마에 힘을 쏟았다.
겉으로는 문주에게 도전하기 위하여 무공 수련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니 실상은 수하들에게 솔선수범하기 위함이었다.
당주인 그가 구슬땀을 흘리며 무공 연마에 열중하였기에 다른 제자들은 태만하고 싶어도 태만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덕분에 맹호당이 정의문 제일당이 될 수 있었다.
그의 성품이 충직하다는 것을 아는 여옥혜는 그를 신임하였다. 그렇기에 말을 하다말고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만천과해지계라는 것은 상대가 속아줘야 성공하는 계책입니다. 속하가 알기론 혈면귀수는 속에 능구렁이가 수백 마리나 들어앉아 있는 자입니다. 따라서 계책이 성공하지 못할 수도…"
"왜? 목숨을 잃을까 두려운가요?"
"아닙니다. 어찌 속하가 목숨 따위에 연연해하겠습니까? 속하는 그저 문주님의 안위가…"
탑탁호골은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일이 잘못되면 혈면귀수에게 겁탈당할 수도 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꺼내면 진짜 그렇게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좌당주, 우리는 지금껏 늙은 여우를 끌어내기 위하여 별의 별 방법을 다 썼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끝끝내 나오지 않았어요. 이제 남은 방법은 이 방법뿐이에요."
"그래도…"
"언제까지고 놈이 나오기를 기다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좌비직은 계속 여옥혜의 말에 토를 달았다. 왠지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산해관에 일대 사건이 벌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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