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배신

등록 2003.08.25 00:59수정 2003.08.25 10:04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퇴근하여 현관문을 두드렸다. 대답이 없다. 평소같으면 아내가 문을 열어줬어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있나?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내가 화가 나서 안방에 앉아 있다. 3살(23개월)짜리 지연이가 엄마 화장품으로 얼굴에 떡칠을 해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지연이 얼굴의 화장품을 휴지로 닦아주며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애원한다. 상당히 화가 난 것같다. 이후 아내는 설거지를 하지만 이래저래 애보는 게 힘들어서 그런지 상당히 화가 나 있는것 같았다. 그 후로도 지연이는 계속해서 징징거리면서 이런 저런 생떼를 썼다. 나도 화가 났다.


애가 귀엽다고 오냐오냐 하며 키워서는 안된다는 평소 생각대로 오늘은 지연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매를 들기로 마음먹었다. 냉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며 매를 들었다. 한 대 '착!'. 지연이는 어떻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놀란 눈으로 울기 시작했다. 두 대, 세 대, 네 대까지 때렸다. "이유 없이 잉잉거리면 안돼", "엄마 말씀 잘들어야지!"하는 말을 네 번 되풀이하면서 내가 생각하기에도 제법 매섭게 때렸다. 때린 이유를 말하긴 했지만 지연이는 맞고나서도 왜 맞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억울하다는 듯이 엄마한테 가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저리 가! 엄마는 지연이하고 놀기 싫어." 단단히 화난 모양이다. 내게는 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결국 아내는 설거지를 끝내고 지연이를 데리고 안방 침대로 갔다. 잠을 재울 모양이다. 나는 컴퓨터를 켜고 해야 할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근데 지연이가 좀 잠이 드는가 싶더니 다시 칭얼대기 시작했다. 칭얼대다가 이젠 작정하고 울기 시작한다. 아내가 안방문을 박차고 나온다. "자기야! 얘좀 어떻게 좀 해봐."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지연이는 생각해보니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다는 듯이 목놓아 울고 있다. 난 지연이를 가슴에 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연이는 울음을 멈출 기세가 아니다. 나는 신경질이 나 있는 아내에게 거실에 나가 자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차마 나가지는 못하고 침대 아래에서 지연이를 외면한 채 짜증난 얼굴로 앉아 있다.

나도 지연이랑 놀아 주려고 많이 노력하지만 어찌 엄마에 비하겠는가? 아내가 화나 있는 것이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연이를 계속해서 다독여보지만 잦아들 기세는 없고 오히려 더 크게 운다. 이번에는 엄마에게 가겠다고 한다. "엄마! 엄마! 엄마한테 갈 거야!" 아내는 엄마에게 가겠다는 지연이의 의사를 계속해서 완고히 외면한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평소 육아에 대해 인터넷 자료 검색등을 통해 공부해놓은 대로 지연이에게 눈을 맞추려 노력하며 좀더 상세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연아! 엄마는 지연이가 엄마 말 안 들어서 너무너무 화가 난대. 화장품을 지연이가 갖고 놀다가 발이라도 미끄러지면 지연이가 피날까봐 그러는 거야. 그리고 왜 이유 없이 자꾸 칭얼거리는 거니? 그러면 엄마가 정말 화난단 말이야." 듣는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울음은 그치지 않는다. 다시 한번 앞에서 한 말을 천천히 또박또박 한 번 더 반복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지연아! 알겠지. 엄마가 많이 화나 있어. 엄마한테 미안해요라고 말해봐." 내 생각에는 얘기를 되풀이해도 알아들을 리는 만무한 것 같은데 울음소리가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다. 다시 한번 엄마가 화난 이유와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라고 눈을 맞추며 정성어린 말투로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한다.


그러자 지연가 놀랍게도 울컥울컥 거리다가 한마디 한다.

"엄마~ 미안해!"

진짜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아빠가 자꾸 시키니까 미안하다고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근데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아내가 지연이를 와락 끌어안더니 "그래, 그래, 그래! 우리 지연이!" "엄마도 미안해"하며 쓰다듬어준다. 한마디 더 붙인다.


"내가 복에 겨워서 그래. 이렇게 아무 탈없이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모르고!"

이내 아내는 지연이를 포대기로 등에다 업고 조곤조곤 달래고 자장가도 불러주기 시작한다. 도저히 잦아들것 같지 않던 지연이는 이내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평화롭고 졸리운 눈으로 잠속으로 빠져 든다.

그런데 아내가 황당한 한마디 비수를 내게 날렸다.

"이 어린 것을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때려요?"

헉 이럴 수가? 아내의 갑작스런 배신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부성이 흉내내려 해도 흉내낼 수 없는 모성이란게 이런 건가보다. 나는 그냥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우리 지연이는 아마 내일도 제 마음대로 안되는 일이 있으면 변함없이 칭얼거릴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런 아내의 비수를 맞고도 나는 지금 행복하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저는 기계 설계일을 하는 회사원입니다.

이 기자의 최신기사 질병의 수렴구조

AD

AD

AD

인기기사

  1. 1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추석 때 이 문자 받고 놀라지 않은 사람 없을 겁니다
  2. 2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아직도 '4대강 사업' 자화자찬? 이걸 보고도 그 말 나오나
  3. 3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우리 모르게 큰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정부는 왜?
  4. 4 [단독] "김건희 사기꾼 기사, 한국대사관이 '삭제' 요구했지만 거부" [단독] "김건희 사기꾼 기사, 한국대사관이 '삭제' 요구했지만 거부"
  5. 5 참 순진한 윤석열 대통령 참 순진한 윤석열 대통령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