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낙선-낙천운동이 필요한 때”

[서영석 칼럼] 시민단체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제언

등록 2003.08.31 01:18수정 2003.08.3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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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접어들면 내년 총선에 대비한 각종 법안 정비작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이 관련법안이란 말할 것도 없이 선거법과 정치자금법, 그리고 정당법 등 선거관련 3법이 그것이다.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9월초부터 한나라당, 민주당이 각각 제출한 정치관계법과 중앙선관위에서 제출한 개정의견 등을 토대로 본격적인 협상에 들어간다. 국회 정개특위의 목요상 위원장(한나라당)은 “9월초부터 논의를 본격 개시해 선거구제와 선거구 획정문제 등에 대해 선거 6개월 전인 오는 10월 15일까지 마무리 짓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제출한 법안이야 일단 당리당략이 개재돼 있다고 보고 일단 판단을 유보하자. 그러나 중앙선관위가 제출한 관련법안의 개정의견은 그래도 정치권의 이해관계와는 한걸음 떨어져 있는 중립적인 방안이라고 간주하고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실제로 정치개혁을 실현하고, 투명한 선거풍토를 확립할만한 방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중앙선관위의 선거법 개정의견은 한마디로 "선거운동의 폭은 현실에 맞게 대폭 확대하되, 돈선거를 방지하기 위한 여러가지 엄격하고 현실적인 제재방안은 대폭 강화한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출마할 예비후보자와 현역 의원과 형평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전선거운동을 일체 금지한 현행 선거법을 고쳐 예비후보자로 선거일 120일전부터 선거운동이 가능하도록 했다. 이로써 과거 현역 의원들은 선거전부터 각종 의정보고회를 빙자해 실질적인 사전선거운동을 벌였던 반면, 다른 예비후보자는 일체의 선거운동을 할 수 없도록 제재함으로써 제기됐던 형평성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인터넷 선거운동을 상시 허용하고 국외부재자 투표를 허용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고, 옥내집회의 경우 선관위에 사전 신고만 하면 횟수제한없이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가 하면, 방송연설이나 정치광고도 횟수 제한을 삭제했다. 또 선거일 90일 전부터 정책토론회 개최를 허용하는 등 선거운동의 폭을 대폭 확대한 점이 중앙선관위 개정의견의 특징이다.

이럴 경우 과열 혼탁 혹은 타락선거의 가능성이 당연히 제기된다. 그러나 이 점은 중앙선관위가 엄격한 선거비용 규제와 사후 처벌을 통해 막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즉 선거비용제한액 초과지출로 유죄판결을 받을 경우, 당선무효조항을 신설함으로써 선거운동을 대폭 허용함에 따르는 금전살포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다.


앞으로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할 사람들은 선거비용제한액의 한도 속에서 정치광고나 방송연설 횟수를 얼마로 해야 할지, 옥내집회는 어느 정도 해야 할지 무척이나 고민해야만 할 것 같다. 이제 입후보자들은 주먹구구식으로 비용을 집행하던 관행에서 탈피해, 처음부터 면밀하게 예산을 짜고, 예산이 최대한 효율성을 갖도록 집행해야만 하게 된 것이다.

선거비용 감시를 위해 모든 선거비용은 신용카드나 수표 또는 계좌입금방식으로 지출하도록 의무화했으며, 특히 국회의원에 당선된 자로서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아 재판중인 피고가 재판정에 불출석해 재판이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당한 사유 없이 2회 이상 불출석한 사람의 경우는 궐석재판도 가능하도록 규정을 고칠 것이라고 한다.


또한 정치자금을 모으는 과정 자체의 투명성을 위해 정치자금법을 고쳐 100만원 이상을 기부받을 경우나 50만원 이상 지출할 경우, 반드시 수표나 카드 등 실명확인이 가능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했다. 한편 한번에 100만원 이상 기부한 사람이나 연간 합쳐서 500만원 이상 기부한 사람의 경우애는 실명을 공개하는 방안도 도입할 예정이다.

특히 정치자금법 위반자에 대해 실질적인 제재가 될 수 있도록 주요정치자금 범죄로 징역형의 선고를 받은 자는 10년간, 100만원 이상 벌금형을 선고받은 자는 5년간 피선거권과 공무담임권을 제한하는 내용도 담겨 있다.

정당법 역시 정치개혁의 추세에 맞게 고쳐져 있다. 지구당 체제를 지금처럼 국회의원 선거구별로 허용하는 것을 바꿔 시군구 단위로 설치하도록 함으로써, 지구당의 숫자를 대폭 줄였으며, 지구당 위원장제를 없애는 대신 3인 공동대표제를 도입했다.

게다가 선출직 공직자와 예비후보자는 당대표를 겸직할 수 없도록 제한한 것도 당정분리 원칙에 따른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도 인터넷을 통한 입당과 탈당을 허용하고, 공직후보자 경선시 비당원인 선거구민도 참여하도록 허용함으로써, 국민참여경선제를 합법화했다. 시대의 흐름에 근접하는 법안정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중앙선관위의 개정의견이 과연 입법과정에서 제대로 반영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필자는 중앙언론사 정치부 기자로서 몇차례의 국회의원 총선거를 지켜본 경험이 있지만, 사실 선거 때마다 중앙선관위가 제시한 선거관련법 개정 의견은 그야말로 그 시대의 유권자의 요구를 그런대로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런데도 왜 중앙선관위는 선거 때마다 혁명적인 개정의견을 제출해야만 했던 것일까. 선거환경이 4년마다 획기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중앙선관위의 개정의견이 언제나 혁명적이었던 것은, 총선 전 선거의 룰을 정하는 선거관계법이 중앙선관위의 개정의견대로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그랬던가. 바로 선거관계법의 개정을 논의하는 주체가 바로 국회의원들이었으며, 선거관계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 주체가 바로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수십년간 생선을 고양이에게만 맡겨오면서 전혀 감시감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선관위의 개정의견은 계속 무시돼 왔던 것이다.

이번 선거관계법 개정의견만 보더라도, 현직 의원들의 프리미엄이 상당부분 제거되고 있다. 게다가 선거관련법을 어겼을 때 재판도 신속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궐석재판제가 도입돼 있고, 정치자금법을 어겼을 경우에는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대단히 현실적인 제재조항도 포함돼 있다.

정치자금을 모금할 때 일정 액수 이상은 실명을 공개함으로써, 이권거래의 대가로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행위가 원천봉쇄되고 있고, 모든 비용은 신용카드나 수표 등 실명확인 가능한 방법만을 써도록 강제하고 있다.

낡은 패러다임의 정치에 익숙한 구태 정치인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조항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조항들이 법제화돼야만 깨끗한 선거가 가능하며, 시대의 조류인 개혁을 실천할 선량(選良)들을 뽑을 수 있다.

그러니 기성정치인들이 쉽사리 이런 식으로 법조항을 바꿀 리가 없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또한 음성적인 선거자금 살포가 가능하도록, 그런 돈을 음성적으로 조달할 수 있도록 관련법들을 개악할 가능성이 지금으로서는 훨씬 높다.

선거구 획정위원회가 바로 당사자인 국회에 설치되고 있다는 현실도 분명 모순이다. 그러니 인구상하한선과 관련해 한나라당 등 일부 당의 의원들이 유권자들 꿔주는 방식 등을 도입한다는 등, 어떻게든 지역구 축소를 막으려는 작태들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선거구 획정위원회는 중앙선관위 산하로 들어가야만 한다.

같은 맥락에서 선거관계법 개정은 실제 의원들의 손에 맡겨져서는 안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입법권은 국회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굶주린 고양이들’에게 ‘생선’을 맡기는 어리석음을 지금까지 범해왔던 것이다.

자, 그러면 선거관련법을 제대로 개정하기 위한 방안은 전혀 없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선거관계법 개정을 국민들이 감시하고, 가야할 길을 이탈하는 국회의원들에 대해서는 다음 총선거에서 엄정한 심판을 가하는 방안이 바로 그것이다. 다음 총선거에서 엄정한 심판이라고 하지만, 주체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누가 주체가 돼야 하는가. 바로 시민단체다.

요즘 시민단체의 친한 인사들을 만나면, 인터넷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선지 시민단체 운동의 역동성이나 효과 등 여러 면에서 전과 같지 않다고 한탄한다. 이슈도 없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지난 총선 때와 같은 낙천 낙선운동이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들 얘기하기도 한다.

이미 정치지형이 과거와 달라졌고, 여러가지 정당들이 처한 상황의 흑백이 너무 분명해, 낙천-낙선운동을 벌이면 특정 정파에 턱없이 유리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 낙천-낙선운동을 하지 못할 이유가 되는 것인지 이해는 가지 않지만, 어떻든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필자가 제안하고 싶은 것이 있다. 무엇인가.

바로 선거관계법 개정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면서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작업을 개시해, 선거관계법을 개악하려는 국회의원이나 정파의 경우 서슴없이 공개적으로 낙천-낙선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제안이다. 이 길은 국민들에게 명분도 있을 뿐더러 다음 총선거를 시민단체가 추구하는 이상에 맞게 강제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안이기도 하다.

또한 시민단체들이 이런 운동을 공개적으로 벌인다면, 국회의원들이 과거처럼 부뚜막 위의 생선을 제멋대로 뜯어먹는 고양이 행세는 하지 못할 것이며, 선거관계법은 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제대로 개정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시민단체들이 선거관계법 개정협상 감시운동에 적극 나설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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