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이자 마지막 책이 될 겁니다

<내 추억 속의 그 이름 106>농사꾼 스님의 세상 나들이

등록 2003.09.01 16:17수정 2003.09.0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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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리운 산골이야기>를 펴낸 법장스님
<사람이 그리운 산골이야기>를 펴낸 법장스님이종찬

"김규철입니다."
"어! 규철형. 그기 어디요?"
"지금 부산에 와 있습니다."
"그~래요? 무슨 일로?"
"내일 오후 2시부터 영광도서에서 법장스님 저자 사인회가 있어요."


지지난 주 금요일 오후 6시 30분쯤, 내가 창원으로 가기 위해 마악 동래전철역에 내렸을 때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핸드폰 창에 찍힌 번호를 보니, 분명 부산에서 걸려온 전화이긴 한데, 내가 잘 모르는 전화번호였다.

누굴까? 그것도 술 마시기 딱 좋은 이 시간에 전화를 건 사람이. 그래. 나는 그동안 내가 아는 사람의 전화번호는 모두 핸드폰에 저장을 해놓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전화가 걸려오면 그 사람의 이름이 핸드폰 창에 뜨기 때문에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군지 미리 알고 전화를 받았다.

근데, 이름도 뜨지 않는 이 전화번호의 주인공은 대체 누굴까. 아마도 잘못 걸려온 전화가 분명할 것이다. 나는 지레 짐작을 하며 조금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근데, 전화를 건 주인공은 김규철형이었다. 김규철형은 나보다 나이가 두어 살 위였지만 내가 서울에 살 때 친구처럼 친했던 형이었다.

"가만 있자. 그럼 어쩐다?"
"법장스님께서도 이곳으로 오고 계시거든요?"
"그래요. 그럼 20분만 기다리세요. 지금 그쪽으로 곧장 갈 테니까."

조금만 일찍 전화를 걸었더라면 전철표를 다시 사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나는 노오란 전철표를 다시 끊어 동래전철역 안으로 들어섰다. 가만. 이렇게 되면 오늘 창원으로 가기는 다 틀린 게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서울에 올라갔을 때 지은 업보(?)가 있는데.


"서울에서 김규철씨가 내려왔다고?"
"그래. 오늘 어떻게 될 지 잘 모르겠어."
"안 봐도 뻔하지 뭐. 그래. 알았어요."

영광도서에 내걸린 법장스님 저자 사인회 현수막
영광도서에 내걸린 법장스님 저자 사인회 현수막이종찬

그 업보란 다름 아닌, 내가 서울에 올라갈 때마다 김규철형을 불러내 밤을 새워 술을 마셨던 그 업보였다. 아내 또한 그동안 그러한 일을 수없이 보아왔던 터라, 단박에 알았어요, 라는 말 한마디로 나의 외박을 승낙했다. 그리고 애들이 기다릴 텐데, 라는 여운을 남기며 전화를 끊었다.

"어이! 오랜만이오."
"미리 연락을 하고 온다는 게 깜빡했어요."
"내가 부산에 내려와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박 사장한테 통화를 하니까 며칠 전부터 부산에 내려와 있다고 하더만. 경주 있을 때 꼭 한번 가 본다는 게 그만…."


영광도서 앞에는 "<사람이 그리운 산골이야기>의 저자 법장스님의 펜사인회"라는 현수막이 자그마하게 걸려 있었다. 현수막이 너무 작아, 하면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근처에 있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500cc 생맥주 한 잔을 비워냈다.

"책은 좀 나가요?"
"그럭저럭 주문이 조금씩 들어오는 편이에요. 하긴 단박에 많이 팔릴 그런 책은 아니니까."
"책이 좀 많이 팔려서 형도 허리띠를 좀 풀고, 법장스님 계시는 절에도 전기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면 좋으련만."

그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법장스님이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마시던 생맥주를 마저 다 비운 뒤, 서둘러 영광도서로 향했다. 저만치 법장스님의 어정쩡한 모습이 눈에 띄었다. 보릿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승복을 입은 법장스님의 모습은 그날따라 어쩐지 꾀죄죄하게 보였다.

전통찻집에서
전통찻집에서이종찬

아마도 오늘도 농사를 짓다가 저자 사인회 때문에 서둘러 부산으로 내려온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법장스님은 검게 그을린 얼굴에 수염도 깎지 않은 모습이었다. 만약 삭발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야말로 전형적인 농사꾼의 모습, 그대로였다.

"스님! 고추농사는 좀 어떻습니까?"
"전염병이 한차례 지나가긴 했지만 그럭저럭 올해도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을 만치는 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몹시 피곤해 보이십니다."
"날씨 탓이지요. 요즘따라 어찌나 후덥지근한 지…. 밤마다 모기도 더욱 극성이고."

이윽고 법장스님과 우리 일행은 영광도서 관계자를 만나 저자 사인회와 관련된 몇 가지 이야기를 간단하게 나눈 뒤, 가까운 민속식당으로 향했다. 시계는 이미 8시 30분을 넘기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음식을 주문했다. 법장스님 또한 배가 몹시 고팠던지 밥 한 그릇을 금세 먹어 치운 뒤, 한 그릇 더 주문을 했다.

"기왕 부산에 오신 김에 부산의 명물 광안대교도 한번 보시고, 해운대 동백섬도 한바퀴 둘러보시지요?"
"우선 어디 가서 차부터 한 잔 하고 가지요? 곡차도 같이 파는 집이면 더 좋고. 지금 저 친구들 머리 속에는 곡차 마실 생각만 가득할 테니까."

다행히 영광도서 부근에는 전통찻집이 하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그 집이 동동주와 전통차를 함께 파는 그런 집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 집에는 동동주는 커녕 담배조차 피우지 못하게 했다. 또한 전통 보리차를 시킨 법장스님은 1시간이 지나도 일어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책을 산 독자에게 사인을 하고 있는 법장스님
자신의 책을 산 독자에게 사인을 하고 있는 법장스님이종찬

법장스님은 계속해서 찻물을 부으며 찻잔에 따라 마셨다. 그리고 그 차를 다 마실 때쯤이면 또다시 뜨거운 물을 가득 붓곤 했다. 이윽고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주전자가 다 비어졌다. 그래. 이제 차주전자 속에 들어 있는 저 찻물만 다 마시고 나면 일어서겠지.

"주인장! 여기 뜨거운 물 좀 더 주시구려."

난감했다. 시간은 이미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 또 새로 시킨 한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다 우려내 마시려면 얼마의 시간이 더 흘러야 할까. 김규철형과 나는 교대로 화장실을 들락거리며 애궂은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이거 이러다가 오늘 술 한잔도 못하고 그냥 자야 되는 건 아닐까.

"아따! 스님! 이제 그만 좀 마시고 일어섭시다. 저 친구들 한시라도 빨리 광안리에 가고 싶어 안달이구먼. 그리고 더 늦으면 횟집 문도 닫는다니깐."
"그럴까. 그러면 일어섭시다."

그랬다. 법장스님을 마중하기 위해 나온 부산 신도 한 분이 마침내 우리를 구제한 것이었다. 그렇게 찻집 계단을 마악 내려오고 있을 때 김규철형이 넌즈시 말했다. 오늘 저 분이 아니었으면 밤 샐 뻔 했다고. 지난 번에 법장스님이 기거하는 절에 찾아갔다가, 밤새도록 차를 마시는 바람에 혼땜한 적이 있었다고.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300여 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300여 명이 몰려 대성황을 이루었다이종찬

"내 법명이 조계종 총무원장과 같으니까, 내 책을 사러 왔다가 그 총무원장의 책을 사 가는 사람도 제법 있다더만."
"그나저나 저자 사인회에 사람들이 좀 많이 와야 법장스님 체면이 설 텐데…."
"글쎄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김규철형과 나 둘만의 기우였다. 이튿날, 오후 1시 30분 쯤부터 저자 사인회에 몰려들기 시작한 독자들은 무려 300여 명 남짓했다. 이는 그동안 부산에서 열린 저자 사인회 사상 최고로 많은 인파였다고 했다. 지난 번 서울 교보문고에서 열린 저자 사인회에서도 그랬고.

"그런데도 책이 채 1만 부도 팔리지 않았으니…."
"하긴, 요즈음 같은 불황에 누가 책을 사 보려 하겠습니까. 게다가 날씨까지 이렇게 무더우니…."
"스님! 그나마 스님 책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팔리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요즈음 다른 책들은 서점에 잠시 전시되었다가 독자들이 선택도 하기 전에 창고로 직행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랬다. 법장스님은 그렇게 저자 사인회를 무사히 마치고 다시 농사꾼 스님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오늘도 전기마저 끊긴 깊은 산자락에 엎드려 직접 농사를 지으며 수도에 정진하고 있다. 하지만 오늘도 내 귀에는 법장스님이 떠나면서 남긴 그 말 한마디가 쟁쟁하게 들린다.

"이 책이 아마도 저의 처음이자 마지막 책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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