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과 추석민심, 호남출신 의원들의 고민

[서영석 칼럼] 강한 유대관계의 토착 기득권세력들과 그 저항

등록 2003.09.15 21:38수정 2003.09.1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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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분명 유기체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인가? 사실 이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 유전자는 유기체의 발생을 규정함으로 유전자의 모든 변화는 그에 상응하는 변화가 유기체에게 일어남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종종 유기체가 진화한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루이스 월퍼트가 확고하게, 그리고 여러 번 말했듯이 “진화에서 변하는 것은 오직 유전자 뿐이다. 그밖에 어떤 것도 변하지 않는다.” … 유기체는 유전자의 가치를 보여주는 거울이지만, 후손에게 전달되는 부분은 오직 유전자 뿐이고, 따라서 진화가 선택하는 대상도 오직 유전자 뿐이다. -피터 벤틀리

신당으로 가느냐, 아니면 박상천-정균환의 민주당에 남느냐. 민주당 호남 의원들의 추석 고민은 다름 아닌 이 문제였을 것이 분명하다. 이들 의원들이 살펴본 추석 민심은 신당에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던 게 분명하다.

<오마이뉴스> 칼럼니스트인 민경진씨는 급속하게 변화하는 디지털 시대에 무슨 추석민심이냐고 비판한 바 있지만, 아날로그 세대에 가까운 이들에게는 추석 연휴 지역구 방문에서 접하는 민심이 중요하게 와 닿았을 수도 있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신주류에 가까웠던 김효석 의원은 “지역민심이 9대1 정도로 (신당이) 어렵겠다”며 14일 사실상 잔류파 회의로 여겨진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했다고 한다.

강한 유대관계의 여론, 약한 유대관계의 여론

아무래도 이들은 신당에 대해 호의적이지 못한 여론을 접한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 여론이 과연 그 지역을 대표하는 여론인가. 한 사람의 국회의원이 사흘간 그 지역에 머물러 한시간 간격으로 10명의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하루 18시간동안 줄기차게 사람들을 만난다면 하루에 180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사흘이면 540명에게 그 지역 여론을 듣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보통 지역구를 10만 유권자로 치면 0.54%의 유권자와 만난 셈이 된다. 사실 한 지역구에서 500명 정도 만나서 의견을 청취한다면 표본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히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표본이 과연 지역구 여론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 표본인가 하는 점인데, 이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그 여론은 정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결론은 불행하게도 표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는 쪽이다. 왜 그런가. 과학잡지 네이처와 사이언티스트의 편집장을 지낸 마크 뷰캐넌이 쓴 네트워크에 관한 책인 <넥서스-여섯개의 고리로 읽는 세상>에 따르면 세상에는 두가지 관계가 있다. 즉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료들과의 사이는 ‘강한’ 유대관계이며,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약한’ 유대관계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좁게 만드는 것, 그래서 여론을 한 커뮤니티 전체로 전파시키는 힘은 강한 유대관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약한 유대관계에서 온다는 것이 마크 뷰캐넌의 설명이다. 물론 이 논리는 마크 뷰캐넌의 논리가 아니라 존스홉킨스 대학의 교수인 마크 그라노베터가 연구한 결과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해설하면, 그 국회의원들과 약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민심이 진정한 지역민심이라는 것이라고 하겠다.

민경진씨가 추석민심은 지역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산재한 인터넷 게시판에 있다며 ‘민심보다는 넷(Net)심’이라고 지적한 배경에는 진정한 지역민심은 약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의견에서 수렴될 수 있는 것란 진리가 숨어 있다.


이런 면에서 인터넷 게시판이야말로 그 국회의원과 전형적으로 약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들은 민심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 것인가. 이들이 만난 사람들은 역시 전형적으로 그 국회의원들과 강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이다.

강한 유대관계의 기득권 집단과 그 저항

게다가 문제는 이들과 강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개혁으로부터 불이익을 받는 일종의 기득권 집단이란 점이다. 민주당이 해체된다면 민주당 지구당 당직자들의 기득권은 일단 상실하게 될 것이며, 부위원장이란 이름으로 활보하는 지역 기득권층 역시 새롭게 탄생하는 정당과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피곤한 일이며, 100퍼센트 보장된 것도 아니다. 신당을 찬성할 리가 없다.

게다가 지역에는 신당을 겨냥해 새롭게 줄을 사는 사람들의 집단이 이미 탄생했을 수도 있다. 민주당을 고수한다면 기득권은 일단 몇 개월 유지되는 것이지만, 민주당을 포기한다면 모든 관계는 새롭게 설정돼야 하며, 일단 선점의 기회를 놓친 이들에게는 정말로 피곤하기 짝이 없는 새로운 관계설정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게 될 것이다.

국회의원은 기본적으로 중앙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지역구는 부위원장단이라는 이름의 지역토호들에게 맡겨둘 수밖에 없다. 이들이 선별해 면담시키는 사람들이 과연 정확한 민심을 전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오산이다. 그것은 정당한 민심이 아닌 것이다.

지역에는 부호들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토호집단이 생성되고, 그 토호들의 일부는 지역언론사의 사주들이기도 하다. 지역언론의 여론은 진정한 바닥민심보다는 토호들의 의사를 반영하기가 훨씬 쉽다. 어떤 의원이 추석 때 지역으로 내려가 그 지역의 언론사 간부들과 만났더니 모두가 신당에는 질색을 하더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실 기득권세력들은 서울에 있는 것도 아니요, 부산에 있는 것도 아니요, 대구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수는 적지만 도처에 존재한다. 거꾸로 호남이라고 해서 기득권자들이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영남의 기득권자들이 한나라당과 강한 유대관계에 있다면, 호남의 기득권자들은 기존의 민주당과 강한 유대관계에 있다.

호남 여론으로 비쳐지는, 그러나 진실은 호남 기득권자들과 강한 유대관계에 있는 집단의 여론은 언제나 민주당 잔류파에 호의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거는 이들의 숫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바닥민심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내분 폭발의 가능성을 안고 가는 불안한 잔류파

민주당이 신당과 잔류파로 나눠진다면 잔류파는 어쩔 수 없이 박상천-정균환의 처리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한화갑 의원은 “우리 나름대로 정강정책을 가지고 있고, 권역별 비례대표제 등 개혁안을 갖고 있다. 민주당이 중심이 돼서 통합과 개혁을 이뤄낼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엄청난 자기모순적인 발언이다.

통합과 개혁의 핵심은 권역별 비례대표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표 방지 차원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지역당적 한계 속에서, 한 지역의 싹쓸이를 방지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그래서 항상 결집도가 약한, 그 결과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영남지역당이 반대하는 것이고, 영남지역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 의회세력분포상 언제나 공염불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통합과 개혁의 핵심은 지역구 기득권의 포기와 국민경선제에 있다. 국민들에게 공천권을 돌려준다는 것이 사실 적은 비용의 정치에 대한 토대이기도 하며, 카리스마를 지닌 정치지도자의 부재란 혼란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는 핵심 추동력이다. 박상천-정균환은 바로 여기에 반대했다. 이들은 역시 잔류파의 개혁 분칠에 반대할 것이 분명하다.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잔류파의 핵심을 이룰 것이 분명한 중도파에서는 박상천 의원의 부상을 꺼려한다고 한다. 그래서 조순형-추미애 의원을 앞장세우겠다는 얘기도 들린다. 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들이 구주류의 철밥통을 보호한다는 여론의 역풍을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신당파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어려움에 봉착한다는 얘기다.

이들에게 공천을 보장한다면 정당개혁은 끝장나고, 중간 보스들의 과점정치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인적 청산이란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파열음은 더욱 잔류파들의 대의명분을 약화시키는 쪽으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잔류파 역시 시대의 흐름인 개혁에 동참한다는 명분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분 폭발의 위험성은 잠재돼 있는 것이며, 또다른 분당 없이 그것은 극복불가능한 위험일 수밖에 없다.

개혁의 유전자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민주당의 신당 진통은 기본적으로 정당개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당개혁의 핵심인 지구당 위원장 기득권 포기와 오픈 프라이머리 형식의 국민경선제에 구주류가 동의했다면 결코 신당파가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구주류는 이러한 정당개혁을 인적 청산으로 이해했고(어쩌면 정당한 이해일 수도 있다), 끊임없는 반대와 억지를 통해 민주당을 정당개혁이 불가능한 정당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사실 지역주의밖에 없다. 민주당 중도파는 이런 지역주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생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면에서 잔류파가 정당개혁을 통해 정치개혁을 이뤄낸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기모순적인 선언일 뿐이다. 신당파는 어떻게든 이들을 안고가기 위해 노력했었다. 구주류의 온갖 억지주장을 다 받아들여줬던 것이다.

왜냐하면 대의원들이 전원 참여하는 전당대회라면, 강한 유대관계보다는 약한 유대관계의 성격이 더 강한 전당대회에서라면, 신당파의 정당 개혁 주장이 먹혀들어갈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을 무산시키는 과정을 지켜본 중도파가 어떻게 정당개혁을 완수할 수 있을 것인가.

정당개혁을 통한 정치개혁은 변화하는 시대의 패러다임이 낳은 거대한 조류다. 그것은 어느날 걸어다니는 원숭이에서 말하는 인간으로 변모한 진화의 과정에 비유될 수 있다. 진화의 유전자는 유기체를 통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진화의 유전자가 정당개혁 혹은 정치개혁이라면, 그 유기체는 정당이다.

하지만 유전자를 잃어버린 유기체는 그가 갖고 있는 생존의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진화의 유전자, 개혁의 유전자는 민주당 당무회의의 난장판을 정점으로 민주당을 떠났다. 개혁의 유전자를 잃어버린 민주당을 통해 한화갑 의원이 밝혔던대로 통합과 개혁의 정당을 만들 수는 없다.

개혁의 유전자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확한 바닥민심은 지역구의 강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 수백명 수천명을 만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지역구란 커뮤니티는 약한 유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전파된다. 그 비밀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한, 추석민심을 백날 떠들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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