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 자기혁신, 자기변화가 절실한 시대

[주장] 생명을 지키기 위해 결연히 맞서는 순교자의 성스러움 필요

등록 2003.09.22 09:21수정 2003.09.22 14:43
0
원고료로 응원
WTO 칸쿤 협상이 결렬되긴 했지만 농산물 부분 초안을 통하여 한국농업의 불가피한 흐름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참 절망적인 내용들입니다.

고 이경해님도 이러한 전개상황에 통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놓는 절박한 상황까지 갔을 것을 생각하면 깊은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신 님께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농산물 관세율이 전세계 3번째로 높은 상황이라도 합니다. 부분적으로는 300%를 넘는 품목도 있습니다. 그간 정부는 정부대로 국내의 농업을 지키려 애쓴 결과라면 결과라고 인정되는 부분입니다.

쌀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것을 지키기 위해 얻어내는 부분만큼 다른 작물에 대해서 양보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다른 작물들은 더욱 심각한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관세율 300%가 넘는 양파, 마늘은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겠지요.

국가경제의 비중이 높은 부분을 살리기 위해 농업을 개방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농업의 중요성을 고려한다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개방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농촌 상황은 농사의 주기로 볼 때 목전에서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과도 다를 바 없습니다.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농민 스스로 존재의 이유를 인정한다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무엇을 할 것인가’란 질문을 차분하게 받아들이면 두 가지의 과제로 분리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 안의 문제와 밖의 문제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농민 스스로가 자기 안의 문제는 보지 않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업지도층이나 언론들이 농민에게 쓴 소리를 하는 것을 회피하므로 상황을 더욱 부추긴다는 생각입니다.

전반의 농민운동은 문제의 화살을 외부로 돌리고 농민 자신을 되돌아보는 문제를 간과하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것은 내 안의 문제와 밖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며 나가야 하지만 한 인간 안에서 ‘성찰과 투쟁’을 동시에 담아내기 어려운 현실을 보고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 없습니다.


현 농촌문제가 외부적 요인에서 발단되었다고 하여 그 속에 함께 동거했던 농민은 모든 문제에 대하여 면책을 받을 수 있는가란 질문 앞에 나는 분명 아니라고 답합니다. 농민도 일정 정도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자기 반성이 전제되지 않는 농민운동은 허망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방적인 책임 전가식의 사고방식으로 그 어떤 문제도 풀지 못하고 결국 외부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농민이 농업이 소멸되는 결과 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 정책적인 차원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임이 분명하지만 한 개인인 농민의 생존 문제에 있어서 밖의 문제에 매달려 내 안의 문제를 되돌아보고 그 안에서 가능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지 못한다면 한 인간으로서 명백한 책임 회피입니다.

이러한 절박한 시대를 통하여 농민이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을 통해 자기혁신의 발로를 만들어야만 희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희망점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부터 탑을 쌓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농업의 문제나 인생의 문제는 서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이든 나를 먼저 문제 삼으며 밖을 보아야만 실마리가 풀리게 되어있습니다. 밖을 문제 삼아 자신도 변화되게 하는 그 노력은 영원한 미궁입니다. 한 농민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전혀 배제하는 자기 회피적인 사고방식을 이제는 버려야만 합니다.

한 해의 농사를 거두어들이고 곳간에 1년 먹을 양식을 쌓아두면 만사가 태평이었던 그 시대, 한겨울 양지 바른 토담 밑에서 옹기종기 한담(閑談)을 나눌 수 있었던 정겨움, 불과 30년 전 농촌의 모습입니다.

그러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 때를 생각하며 오늘의 농촌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집집마다 농기계로 가득하고 온갖 가전제품이 들어와 있어 도시인의 소비수준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풍요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듯하나 먹을 양식만 있으면 느꼈던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은 좀처럼 찾을 수 없고 빚만 가득합니다.

현재 농촌의 문제는 엉켜진 실타래와 같이 상당한 복잡성을 띠고 있어 단편적인 해석이 불가하나 농촌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농민의 입장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현재 농촌생활에 대해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 농업과 생활의 고비용 구조를 농민 스스로 청산해야만 희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한 시대에 공존하는 기업은 생존을 위해서 사활을 건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데 왜 농민에게는 그런 노력이 없습니까. 아직도 농민들은 상황에 대해 의타적입니다. 농민운동의 양상도 의타적임을 여실히 볼 수 있습니다. 항상 ‘당신이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란 식의 방식이지요. 나와 우리가 없습니다. 어려울수록 나와 우리를 찾아야 합니다.

농업의 문제는 경제의 문제이기에 농업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농가 재정구조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출은 그대로 두고 수입을 확대하려는 구태의연한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현 농촌상황에서 뚜렷한 소득대책이 없기에 농민이 취할 수 있는 방안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소비수준을 과감히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한 강연에서 “월 생활비가 250만 원이 들어가면 여러분들은 그것을 50만 원으로 줄여야 현 농촌에서 살 수 있습니다. 농업을 무조건 친환경농업으로 바꾸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상당수의 농민들은 아주 의외의 말인듯 하면서도 충분히 공감하는 분위기였음을 기억합니다.

그 많은 계모임, 수시로 이루어지는 관광, 필수품이 된 핸드폰과 차량, 즐비한 가전제품, 기대만 가득한 교육열, 이런 돈의 고리들을 그대로 놓고 생활비를 줄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항변을 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무책임한 항변을 늘어놓을 시점이 아닙니다.

아무리 강한 사고구조를 가진 사람도 돈의 쪼들림 앞에서 힘을 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돌아보고 정상적인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돈의 압박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웬 농촌문제를 말하는 글에서 생활비 문제를 가지고 사사롭게 말하는지 이해가 어려운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바로 현실의 문제입니다.

현 농촌의 소비구조에 대한 깊은 문제의식을 농민 스스로 갖고 자본주의적인 소비구조를 청산하고 청빈낙도(淸貧樂道)하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가정으로 끌어들여야만 합니다.

비슷한 평수의 영농규모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서 오로지 ‘세레스(농업용 자동차)’한 대로 필요한 모든 일을 해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농업용 차량 1대와 짐차 1대, 자가용 1대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각종 농기계로 가득한 엄청난 크기의 창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경운기 한 대만을 가지고 충분히 농사를 짓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화려한 씀씀이를 가진 농민이 있는가 하면 다방에서 커피 한 잔 먹는 것까지 안절부절못하는 농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정부가 국가의 비전을 ‘동북아 허브’로 설정했다는 것은 농업은 포기한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정부는 농업유지 정책에서 농촌유지 정책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 유지정책에 농민 전체가 수혜자가 될 수 있을 지는 미지수입니다. 아마도 농업인구가 더 많이 줄어드는 것을 정부는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생존의 문제 앞에 우리는 밖의 문제와 함께 내 안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포기하면 다른 것은 없지 않습니까. 나로부터 가능한 내 안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한다는 진지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 시대야말로 기존 농업의 틀, 생각으로부터의 새로운 전환이 절박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일지라도 노력하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믿음으로 접근을 해 봅시다. 생명은 절대 포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있는 중국을 봅시다. 사과(41%), 감귤, 배(61.4%)의 재배면적이 세계 1위입니다. 더욱이 사과는 우리나라에 79배, 배는 38배의 수준입니다. 포도도 수년간 재배면적이 무려 28배 이상 증가되었습니다. 하루의 일당은 4000원, 인부의 월급은 7~8만 원 선입니다.

중국의 한 성에 불과한 흑룡강성의 쌀 재배면적은 일본의 1.7배에 달합니다. 그곳의 쌀시세는 1만8000~2만 원(1가마 당) 사이입니다. 국제 곡물 메이저들은 벌써 수 년전부터 쌀수출 전략기지를 이곳에 마련하고 있습니다.

남북한에 철로가 개설되고 도로가 개통이 됩니다. WTO협정으로 우리가 5% 최소관세율을 유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한국의 농촌은 그대로 절망입니다.

어찌했든 한국의 농촌은 가까운 북한의 농촌, 중국의 농촌과 견줄 수 있어야만 생존 가능합니다. 이제는 먼 나라 미국, 칠레만 문제가 아닙니다.

농업에 있어서 생산비를 줄이면서 초저비용으로 실현가능한 친환경농업으로 가는 일, 그리고 생활의 자립도를 최대한 높이기 위해 초절제 생활로 되돌아가는 일. 어렵지만 우리 농민이 해내야 하는 일들입니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결연히 맞서는 순교자의 성스러움으로 우리는 길을 열어가야 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억대 연봉이지만 번아웃 "죽을 것 같았다"... 그가 선택한 길
  2. 2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3. 3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28년 만에 김장 독립 선언, 시어머니 반응은?
  4. 4 맥주는 왜 유리잔에 마실까? 놀라운 이유 맥주는 왜 유리잔에 마실까? 놀라운 이유
  5. 5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윤 정권 퇴진" 강우일 황석영 등 1500명 시국선언... 언론재단, 돌연 대관 취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