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의 잠도 잠

<호주여행기13>시드니'2002년 12월 30일 월요일'

등록 2003.09.27 10:15수정 2003.09.28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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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시드니는 호주의 관문답게 정신이 없었다. 마치 종로통 같기도 하고 명동같기도 하고 사람이 너무 많았다. 한동안 한가로움에 길들여졌던 나는 이 북적거림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코치 터미널(Coach Terminal)에 내려 밀려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a 뉴질랜드로 가는 페리 뒤로 하버브릿지가 보인다

뉴질랜드로 가는 페리 뒤로 하버브릿지가 보인다 ⓒ 이현자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다 나를 보니 행색이 너무 초라했다. 버스 안에서 하루를 보냈으니 꼴도 꼴이려니와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머리가 찌끈 찌끈 아팠다. 전날도 덥고 모기에 뜯겨 못 잔데다 몸도 말이 아니고 그저 씻고 눕고 싶을 뿐인데 사람들은 이런 나를 툭툭치고 간다.

우선 먼저 도착한 지니를 만났다. 우체국을 찾아가 소포를 보내고 숙소를 찾아 보았다. 이미 한달 전에 시드니에 있는 백팩커스는 예약이 마감된 상태라는 것은 알았지만 '보장할 순 없지만 직접 오면 구할 수 있을거'라는 답변이 우리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리고 설마설마하면서 무조건 시드니로 들어왔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 보았지만 역시 숙소는 없었다. 가장 이른 것이 '2003년 1월 2일이나 되어야 하는데 예약하겠느냐'고 물었다. '에라 모르겠다.' 전화를 끊어 버리고 서로 두려운 눈빛을 주고 받으며 나직하지만 확고한 마음으로 우린, '오늘 피시방에서 버틴다. 그리고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한다'고 다짐했다.

꼭 필요한 것만 빼고 코치 터미널 인포메이션 센타(Travellers Information Coach Terminal) 락커에다 9A$을 들여 짐을 넣었다. 시드니의 홈리스가 된 우리는 주변에 갈 만한 PC방을 물색했다. 그리고 트레블 패스(Travel Pass) 그린을 35A$주고 샀다. 트레블 패스는 버스, 전철, 페리를 일주일간 이용할 수 있는 것으로 오랫동안 시드니에 머무는 여행객이 사용하기에 저렴하고 편리하다. 존별로 레드, 그린, 옐로우, 핑크, 브라운, 퍼플로 나뉘어져 있어 자기가 가고자 하는 거리를 참고해서 사면 된다. 그리고 저녁 5시 이후에 사면 당일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우선, 서큘러 키(Circular Quay)로 향했다. 서큘러 키는 페리는 물론 버스와 전철이 모두 모이는 교통의 중요한 거점이다. 서큘러키까지 지도를 보며 걸어갔는데 비릿한 바다 냄새보다 먼저 하버브릿지가 보였다. 몸이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우와 하버브릿지다' 하는 소리가 튀어 나왔다. 곧이어 짝을 이루듯 오페라하우스도 '여기있다'고 손짓을 했다.

a 페리에서 본 하버브릿지

페리에서 본 하버브릿지 ⓒ 이현자

내가 사진에서 본 하버브릿지나 오페라하우스는 항상 맑고 밝은 이미지였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 시드니의 날씨 때문인지 검푸른 바닷 빛 때문인지 모든 것들이 우울해 보였다. 하버브릿지도 오페라하우스도 바다 빛도... 마치 마네의 그림, 나폴레옹 제2제정에 반대했던 프랑스의 언론인이자 정치인이었던 앙리 드 로슈포르(Henri de Rochefort)의 탈출 장면을 묘사한 '로슈포로의 탈출(L'Evasion de Rochefort)'을 보는 듯했다.

우울하고 절박한 이미지라고 해야할까? 어쩌면 몸은 피곤한데 그 피곤한 몸이 쉴 곳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페리를 타고 서큘러 키에서 맨리(Manly)를 가다가 보게 되는 중죄인들의 수형소는 그러한 생각을 더 깊게 한다. 밑에는 식인 상어들이 오가고 보이는 것은 오직 바다와 하늘, 들리는 것은 파도소리뿐인 수형소의 죄인들을 생각한다. 그 적막함과 두려움과 싸우다 죽어갔겠지... 파도는 잔잔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푸른 하늘 빛과 물빛은 너무 불안하다.

바다에 머문 시선을 옮겨본다. 프랑스제 이중 유리로 지붕을 만든 오페라하우스가 보인다. 날이 좋을 때 보면 유리가 빛에 반사되는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고 한다. 오페라 하우스는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다. 1957년 국제설계공모전에서 당선된 덴마크의 건축가 욤 우촌의 설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1959년 뉴 사우스 웰스 주 정부에 의해 예산액 7백만 달러로 시작했으나 1973년 마지막 공사를 마치고 보니 최종 공사액이 1억 2백만달러에 이르렀다고 한다.


독특한 지붕은 조개껍즐을 형상화 했다고도 하고 요트의 하얀 닻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하고 오페라 하우스를 디자인 하던 중 욤의 아내가 접시에 잘라 온 오렌지 조각을 보고 설계에 착안했다는 설도 있다. 설이야 어느 것이 진짜이든 오페라 하우스의 모양이 시드니의 바다를 배경으로 자연의 일부인 듯 조화를 이루며 거기 그렇게 서 있었다. 다른 것은 잘 모르겠지만 가장 좋은 건축물의 재료는 바다, 산, 들, 나무와 같은 자연 환경 조건인데 오페라하우스를 설계한 욤은 그 재료들을 가장 잘 활용한 듯 했다.

a 오페라 하우스

오페라 하우스 ⓒ 이현자

오페라 하우스와 쌍을 이루는 하버브릿지는 시드니 하버의 북쪽 밀선스 포인트와 남쪽 다위스를 연결하는 아치형 다리다. 이는 세계경제대공항 때인 1923년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한 공공정책의 일환으로 건립된 아치형의 철골조 다리다. 이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시드니 남부와 북부의 교통수단은 페리뿐이었다고 한다.

맨리는 끈적끈적했다. 하루종일 씻지 못 해서 샤워장을 찾아가 간단히 씻고 나니 좀 살 것 같았다. 비치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상어박물관을 보고 부두에 누워 손 바닥과 발바닥을 하늘에 보여주며 놀았다.

가만히 손과 발을 보니, 날씨가 건조해서 그런지 피부는 무척 거칠어졌고, 피부도 좀처럼 타지 않는 하얀 피부인데 이제 서서히 내 몸에 검은 빛을 내는 모든 것들이 슬금슬금 올라오고 있었다.

8시30분 마지막 페리를 타고 들어와 전철을 갈아 타고 센트럴스테이션으로 오다 생각하니 PC방보다는 공항이 안전할 것 같았다. 패스가 있으니 차비도 따로 들 필요없고 내일 아침 공항으로 마중나갈 사람도 있고 그래서 국제공항역까지 가긴 했으나 공항이용료 8A$를 내란다. 그래서 다시 센트럴스테이션에 도착하니 11시정도였다.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가고 춤추고 놀기 위해 나이트클럽 입구에서 기다리는 젊은이들 밖에 없었다.

PC방에서 한 시간은 2A$은 4시간 이후는 5A$이어서 5A$를 내고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목까지 깊게 올라오는 의자는 찾아 볼 수가 없고 딱딱한 나무의자다. 심지어 등받이가 없는 것도 있다. 결국, 그 어떤 통신수단도 사용하지 않고 여행만 하고 돌아가려던 내 계획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우선, 인터넷상에 나온 숙소가 있나 뒤져보고 이메일도 확인하려는데 키보드에 한글이 없다. 독수리처럼 쪼아가며 키보드를 두드리는데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a 오페라 하우스 뒤로 시드니 시내가 보인다

오페라 하우스 뒤로 시드니 시내가 보인다 ⓒ 이현자

12시가 좀 넘어서일까 지니의 전화가 울렸다. 퍼스에서 같이 공부하다가 시드니로 온 일본 친구란다. 그들은 블루마운틴을 다녀오는 길이라고 하이드파크 버스정류장에서 1시에 만나자고 한다. 그들을 만나서 382번 버스를 타고 본다이정션에 있는 나오꼬의 랜트하우스로 갔다.

집은 너무 낡았고 지저분했다. 내가 듣기로는 일본사람들은 거의가 좋은 조건에서 산다고 하던데 예외는 여기도 존재했다. '아래층에 한국인이 산다'며 소개를 시켜준다. 우린 내일 새벽에 나가야 하는데...그는 대뜸 '뭐가 먹고 싶냐'며 내일 자기가 해주겠단다. 마치,박목월의 시 속에 나오는 '오라비'처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말한다. 그저 시드니의 홈리스에겐 모든 것이 고마울 뿐이다.

씻고 나니 나오꼬는 담배를 물고 차를 타 오며 자꾸 말을 시킨다. 눈이 저절로 감기고 있는데 말이다. 내일 7시 30분까지 공항에 가려면 6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그래도 집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이틀만에 두 다리를 뻗고 잠자리에 누운 우리는 등을 대고 편히 누울 수 있는 공간의 고마움을 알았다. 더불어 그 피곤한 가운데도 쉰들러 리스트의 유태인 엄마의 말이 생각났다. 잡혀가면서 좀 전에 자기 가족을 발견하고 모른척 해 주었던 히틀러의 부하가 된 딸 아이의 친구에게 하던 말 '한 시간의 생명도 생명'이라던' 아! 한 시간의 잠도 잠'하며 나는 단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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