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안산 내시(內侍) 승극철의 묘에 제사지내다

천여기의 떼무덤이 있는 초안산...유적 보호 시급해

등록 2003.09.29 15:00수정 2003.09.30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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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여기의 떼무덤이 있는 초안산

노원구 월계동과 도봉구 창동에 걸쳐 있는 초안산(楚安山)에는 약 1천여기에 달하는 조선 시대의 무덤들이 밀집해 있다.


흔히 '내시묘'로 잘 알려진 이 무덤군에는 비단 내시들의 무덤뿐 아니라 단장이 잘 된 이름 있는 문중의 선산도 있어 조선 시대의 '공동묘지'였음이 서서히 밝혀지고 있다. 더구나 1950년의 한국 전쟁 때에는 국군이 이곳에 '창동저지선'을 치고 북한군과 치열한 접전을 별여 피아간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 현대에 와서도 '죽음'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기이한 인연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인연 때문일까? 이곳은 2002년 3월 9일에 '초안산 조선시대 분묘군(楚安山朝鮮時代墳墓群)'이라는 이름으로 사적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초안산은 왜 조선의 공동묘지가 되었을까?

이름에서부터 편안한 안식처를 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초안산은 여러 근거들로 인해 이미 '공동묘지'의 운명이었던 듯하다.

조상 숭배 사상이 투철했던 조선은 그에 따라 매장 문화도 잘 발달했다. 그리고 무덤을 써도 꼭 집 근처에 두고 싶어했다. 그러다 보니 나라에서는 도성 외곽 전부가 '무덤숲'이 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대비로 경국대전에 이미 '한양성 십리 이내와 인가에서 백 보내에는 입장(入葬)하지 못한다'라는 제한 규정을 두고 있다. 속대전에서는 이를 한층 더 강화시켜 형전(刑典) 금판(禁判)조에 '한양에서 십리 이내에 입장(入葬)하는 자는 도원릉수목율(盜園陵樹木律)에 의하여 논죄한다고 명시했다. 왕릉에서 나무와 풀을 무단으로 베어가는 자는 중형을 받게 되어 있는데 만일 한양성 십리 이내에 매장을 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 준하는 죄를 주겠다는 선포였다.

이제 무덤을 쓰려면 한양성 밖 10리를 벗어나야 했다. 한양성 밖 십리는 어디인가? 일본인들이 잘못 만든 계산법으로 흔히 10리라면 4Km를 생각하기 쉬우나 정확한 우리 식의 거리 개념으로 10리는 약 4.7Km가 된다고 한다.


(1보: 21.79cm(1자의 길이)×6자=130.74cm, 1리: 130.74cm(1보의 길이)×360보=47,066cm(470m), 10리: 130.74cm×3600보=470,664cm(약 4.7km))

더불어 한 가지를 더 고려해야 한다. 죽은 사람은 한양의 4대문으로는 나가지 못했다. 서울에서 시신이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광희문(光熙門,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을 통해 나와야 했다. 광희문 밖 10리(4.7Km)는 어디인가! 도봉산, 북한산 일대가 된다. 그러나 그곳은 바위산으로 산세가 험할 뿐더러 서울을 지키는 진산이 되어 묘자리로는 적합치가 않다. 그래서 초안산이 적지가 된 것이다.


초안산은 마사토 지질로 배수가 잘되고 험하지 않은 야트막한 야산(해발 약 100m)이며 서울의 동북방에 자리잡고 있어 묘자리로는 그야말로 제격이다. 왼쪽에 중랑천, 오른쪽에는 우이천이 감싸고 있다.

초안산에 가장 큰 묘역을 갖고 있는 예안 이씨 문중에 따르면 "좌선궁(左仙宮) 지형으로 천록천마(天錄天馬)는 부귀의 임용(任用)이요 재산(財産)이 우포좌궁(右抱左宮)하면 명당이 단정하고 장후(葬後)에 방(房)이 부귀 백여년한다"는 땅이라고 한다. 또 한 풍수가는 도봉산 언저리에 자리잡은 도봉구는 하늘의 중심이자 옥황상제가 거처한다는 자미원(紫微垣)의 기를 집중적으로 받는 명당이라고도 한다. 한 마디로 말해 묘자리로 명당이고 좋은 자리라는 뜻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초안산에 묘를 쓰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고 양반 사대부와 내시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무덤들이 무려 1천3백여기가 조성된 것이다.

a 초안산에서 조금 봉긋해 보이는 것은 모두 무덤이다

초안산에서 조금 봉긋해 보이는 것은 모두 무덤이다 ⓒ 이양훈


a 목이 잘리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석물들

목이 잘리고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석물들 ⓒ 이양훈


a 만력45년이란 글씨가 보인다. 만력제는 임진왜란때 중국 명나라의 황제. '만력45년'이면 서기1618년이 된다. 이 비가 조선 광해군때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만력45년이란 글씨가 보인다. 만력제는 임진왜란때 중국 명나라의 황제. '만력45년'이면 서기1618년이 된다. 이 비가 조선 광해군때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 이양훈


초안산이 특별한 이유

그러나 조선 시대의 공동묘지라 해서 뭐 그리 특별할 것은 없다. 지금도 천지사방이 다 묘자리이고 그러다 보니 화장을 권장하는 시대가 아닌가! 눈만 돌리면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무덤들이 조금 옛날에 조성되어 모여 있다해서 사람들의 특별한 관심을 끌 리는 만무하다. 초안산이 특별한 것은 바로 통훈대부 내시 승극철의 묘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내시(內侍)라 함은 거세되어 궁중에서 벼슬을 하는 남자를 뜻한다. 시인(寺人)·엄관(企官:奄人)·정신(淨身)·내수(內竪)·중관(中官)·혼시(汚寺)·환시(宦寺)·환자(宦者)·황문(黃門) 등의 이름도 있다. 고려와는 달리 직접 정치에 참여할 수는 없었으며, 또한 자질 향상을 위하여 '소학', '삼강행실' 등의 교육을 받고 매월 시험을 치루기도 했다. 일종의 전문직 종사자였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내시는 궁궐에 상주해야 하는 까닭에 거세자만이 입명될 자격이 있었다. 남자라고는 지엄하신 왕이 있을 뿐이고 오직 여인들 뿐인 궁궐에서 숙식하며 지내야 했으니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었던 듯도 하다. 내시는 선천적 거세자가 대부분이었으나 스스로 거세하여 임명된 자도 많았다. 왕과 가까이 있으니 권력이 거기 있었기 때문이다. 거세를 했으니 당연히 자식을 낳을 수 없었고 궁인의 신분이니 결혼 또한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평생 그렇게 궁궐에서 살다가 쓸쓸히 죽어 나가는 것이 정해진 내시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시가 결혼을 해 부인을 두었다니!

통훈대부(通訓大夫) 내시(內侍) 승극철(承克哲)

그 의문을 풀어줄 무덤 한 기가 초안산의 북쪽편 귀퉁이에 3백여년의 세월을 견디며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바로 통훈대부 내시 승극철과 그의 부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그것이다.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통훈대부행내시부상세승공극철양위지묘'(通訓大夫行內侍府尙洗承公克哲兩位之墓)

통훈대부(通訓大夫)란 조선시대 문산계의 하나로 당하관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로 종3품이 한계였다. '행'(行)이라는 글자는 그 뒤에 나오는 '내시부 상세'(內侍府尙洗)라는 직책과 관련이 있다.

조선시대의 내시들은 품계와 직책을 가진 당당한 궁중의 전문직이었다. 종9품 상원에서부터 종2품 상선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직제에는 상세한 직무가 정해져 있었다. '상세'(尙洗)란 내시부에서 정6품의 품계를 갖는 대전의 그릇등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종3품의 품계를 가진 이가 정6품의 하급관직을 지냈으니 '행'(行)이라는 글자를 쓴 것이다. 품계가 낮은 자가 상급의 관직을 갖게 되면 '수'가 붙는다. 풀어보면 내시부의 상세를 지낸 승극철의 묘라는 얘기인데 그 바로 앞에 있는 '양위'(兩位)라는 글자가 바로 이 묘를 그토록 유명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양위'(兩位)란 두 분을 모신다는 뜻이고 '양친 부모'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부부'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내시가 결혼을 한 것과 죽은 뒤 무덤까지 같이 조성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증명된다.

a 유명한 승극철의 묘. 강사선생님께서 설명을 해 주고 있다.

유명한 승극철의 묘. 강사선생님께서 설명을 해 주고 있다. ⓒ 이양훈


a 내시 승극철의 묘에 제사지내는 모습

내시 승극철의 묘에 제사지내는 모습 ⓒ 이양훈


a 승극철의 비 뒷면. '숭정기원'이라고 써 있다. 숭정제는 명나라 제 17대 황제로 이름은 주유검이다. 서기로 1628년, 이 비가 조선조 인조때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승극철의 비 뒷면. '숭정기원'이라고 써 있다. 숭정제는 명나라 제 17대 황제로 이름은 주유검이다. 서기로 1628년, 이 비가 조선조 인조때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 이양훈


원래 이곳에는 승극철을 비롯한 내시들의 묘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이유들로 모두가 없어지고 지금은 오직 내시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승극철' 그의 묘 단 한 기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초안산은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채 오늘도 묵묵히 서 있다. 사적지로 지정만 되고 아무런 조사 활동이나 보호가 되지 않고 있는 초안산. 각종 체육 시설과 골프 연습장까지 들어서 망자들이 죽은 뒤까지도 편히 쉴 수 없게 되어 버린 초안산의 흩어진 넋들을 위해 지금이라도 보다 정확한 조사와 보호가 시급하다.

a 체육시설의 벽에 옹색하게 가까스로 붙어 서 있는 문인석

체육시설의 벽에 옹색하게 가까스로 붙어 서 있는 문인석 ⓒ 이양훈


a 체육시설 안 땅속에 묻혀 얼굴만 내 놓고 있는 또다른 문인석. 이곳은 안동김씨의 묘였다고 한다

체육시설 안 땅속에 묻혀 얼굴만 내 놓고 있는 또다른 문인석. 이곳은 안동김씨의 묘였다고 한다 ⓒ 이양훈


<이 글은 2003년 9월28일 참교육학부모회 동북부지회에서 실시하는 역사기행 프로그램 '노원의 뿌리를 찾아서'를 다녀와 강사이신 이윤숙 선생님의 강의와 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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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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