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추가 파병 문제와 관련해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관계자들의 입에서 심상치 않은 말들이 연일 나오고 있다. 노무현 정부는 아직까지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은 채 "신중하게 판단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미 파병 쪽으로 가닥을 잡고 '바람잡기'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하듯, 김진표 경제부총리는 29일 국정감사에서 "침체된 나라 경제를 고려하면 이라크 파병 문제가 중요한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의 질문에, "이라크 파병 문제가 신속히, 또 파병 쪽으로 결정되는 것이 경제 자체에 도움이 된다"고 답변했다. 김 부총리는 특히 "대통령께 몇 차례 관련 회의에서 나름대로 이 같은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같은 날 조영길 국방부 장관도 인터넷 국정브리핑과의 인터뷰에서 "파병 여부 결정 시기와 관련해 현지조사단이 복귀한 후 그 동안 수집한 자료를 종합해 신중하게 결정할 예정"이라며, "상황상 오는 10월 말 예정된 한미 연례안보협의회 이전에는 대략 방향이 결정돼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 역시 30일 기자간담회에서 "너무 늦어져서는 곤란하다"고 말해 조만간 파병 여부를 결정할 것임을 시사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29일 발언 역시 파병에 무게를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 대통령은 한미동맹 50주년을 맞아 주한미군 사령관과 미국 대사 등 130여명을 초청해 가진 만찬에서 "지난 50여년간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도움을 받아온 것을 한국민이 잘 알고 있다"며 "한국은 세계평화 발전에 기여함으로써 갚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해 파병과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지만, 대통령 스스로가 '미국 보은(報恩)론'까지 직접 거론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미국의 파병 요청을 거부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지나친 친미 발언이 정책결정의 입지를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럼스펠드에게 선물을?
미국 정부 관계자들 역시 5천명선이라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면서, 한미연례안보협의회(SCM) 참석차 10월 24일 한국을 방문하는 도날드 럼스펠드 미국 국방장관의 방한전까지 파병 결정이 내려지기를 희망한다며 거듭 '조기 파병 결정'을 압박해오고 있다.
이에 따라 국민여론과 국제사회의 동향, 그리고 국익 등을 종합해 천천히 판단하겠다는 '신중론'이 후퇴하고, '조기 파병론'이 한미정부 안팎에서 힘을 얻고 있는 추세이다. 특히 한미 정부 관계자가 잇따라 파병 결정 시점을 도날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방한 시점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것은, 날개 꺾인 럼스펠드에게 다시 날개를 달아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부시 행정부의 실세 중에 실세로 지목받아온 럼스펠드는 군사력에 기반을 둔 미 제국주의 실현의 '관문'이 될 것으로 보였던 이라크 침략전쟁이 오히려 자신을 비롯한 부시 행정부에게 헤어 나오기 힘든 '함정'이 되면서 사면초가에 몰리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의 대외정책 주도권은 점차 상대적인 온건파인 콜린 파월 국무장관에게 넘어가고 있고, 이에 힘입어 최근 미국의 대북정책도 조금이나마 유화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미국 정부의 기대대로 럼스펠드가 방한해 '한국군 추가 파병'이라는 선물보따리를 들고 미국에 돌아간다면, 럼스펠드의 입지는 그만큼 강화되게 된다. 또한 다른 나라의 동향을 살피면서 파병 신중론으로 돌아선 많은 국가들에게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기실 파병 문제와 관련해 이라크와 한반도는 물론이고 세계평화의 관점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는, 한국의 추가 파병이 럼스펠드를 필두로 한 강경파들에게 재기의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미국 강경파들의 재기 및 부시 행정부의 재선 여부의 최대 변수가 이라크 문제가 되고 있는 현실에서, 한국의 전투병 파병이 이들의 이라크 점령 계획에 일조하게 될 경우, 강경파들의 대외정책 영향력 회복 및 부시 대통령의 재선에 기여하게 되는 어이없는 결과를 낳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국익의 핵심인 한반도 평화에도 커다란 위협이 될 것이다.
파병을 통한 경제적 실리?
파병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김진표 장관의 주장은 현실에도 맞지 않을 뿐더러, 경제적 실리를 위해 더러운 전쟁의 부역자로 나서야 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큰 문제가 있다. 구한말 강대국의 이권다툼으로 만신창이가 된 바 있는 우리가 정부의 고위 관계자로부터 이러한 말을 들어야 하는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경제적 실리의 관점에서 바라보더라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우선 파병론자들이 주장하는 '경제적 실리 챙기기'는 전투병 파병의 최소한의 정당성 마저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파병 찬성론자들은 비록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후세인 독재 정권을 축출함으로써 이라크에 '민주주의 수립'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정당화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라크의 혼란 상태를 하루 빨리 수습하고 민주주의 수립에 기여하기 위해 한국도 전투병을 파병해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파병을 통해 전후 복구 사업 참여 및 안정적인 원유 도입선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른바 '경제적 실리론'은 이라크에서의 '친미정권 수립'을 전제로 한 주장이다.
즉, 미국이 전후 복구 사업 및 석유 통제권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한국이 떡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 즉 주권은 해당국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마저 무시한 것이다.
또한 부시 행정부의 희망대로 이라크에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친미정권이 수립될 가능성도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미국 정부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라크에서의 반미감정과 유혈사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또한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서 친미정권을 수립하려고 할 경우에, 이라크 내부의 반발은 물론이고 유엔 등 국제사회의 협력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더구나 이라크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친미세력이 집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이라크에서의 친미정권 수립을 기대하면서 미국의 부역자로 나서 경제적 실리를 챙기겠다는 것은 명분은 물론이고, 실리의 관점에서도 너무나도 위험하고도 무책임한 발상이다.
수천억원대의 자비를 들여,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지역에 수천명의 전투병을 파병하면서까지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실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전후 복구 사업과 원유 도입선을 확보할 수 있다는 파병 실리론자의 눈에는 파병시 지불하게 될 수천억원과 한국군의 위태로운 목숨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인가?
한미관계의 현실을 고려할 때, 정부의 곤혹스러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파병 문제에 대한 국민의 비판 여론이 잠잠해진 틈을 타, 당초의 신중론을 뒤로하고 조기 파병론을 펴고 있는 것은 마땅히 자제되어야 한다. 말이 지나치게 앞서가면 뒷수습을 하기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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