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행훈 동아일보 전 국장
동아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장행훈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겸임 교수가 국제언론인협회(IPI)의 한국 결의안 채택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실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장 교수는 최근 발행된 월간 <신문과 방송>(한국언론재단 발행) 10월호에 '한국언론은 왜 고뇌의 몸부림 없나-IPI 결의안 채택에 부쳐'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사실 확인 없이 한쪽의 이야기만으로 IPI 결의안을 대대적으로 보도한 '조중동'의 태도를 꼬집었다.
그는 이 글에서 "이른바 조선·중앙·동아 3대 신문이 노무현의 당선을 막아 보려고 그렇게 노력했어도 그가 당선된 것은 인터넷의 힘이 신문의 힘을 약화시킨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신문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낮아진 것도 한 요인이 됐다"면서 신문의 신뢰도 추락을 우려했다.
또 그는 "당면한 한국신문의 문제는 조·중·동의 노무현 새 대통령에 대한 증오 보도에 있다고 본다"며 "그것이 세 신문의 독자층인 보수세력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든 보수신문들과 대기업의 상호간의 타산적 경·언유착에 원인이 있든 또는 특정 신문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원한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든 간에, 적어도 이 정권 출범 이후의 세 신문의 보도태도에서는 증오의 냄새가 풍긴다"고 질타했다.
장 전 국장은 지난 59년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 주불특파원·외신부장·논설위원·출판국장·유럽총국장 등을 지냈으며, 89년부터 90년까지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이후 96년 동아일보를 그만 둔 장 전 국장은 아태평화재단 사무총장을 맡기도 했다.
다음은 장 전 국장이 쓴 글의 전문이다.
<한국언론 왜 고뇌의 몸부림 없나>
- IPI 결의안 채택에 부쳐
9월 중순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국제언론인협회(IPI)가 한국을 3년째 언론자유탄압 감시대상국으로 지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IPI 결의안은 한국의 언론상황을 놓고 한나라당과 정부가 국회에서 공방을 벌이는 촉매제가 됐으며, 조선·중앙·동아는 노무현 정부가 강압적인 언론정책을 쓰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사설을 싣고 권위 있는 국제언론단체로부터 언론탄압 감시대상국으로 지정된 것을 정부는 부끄럽게 여겨야 한다고 호통을 쳤다. 보수신문과 한나라당은 마치 IPI의 결의안 채택이 중세 로마 교황의 파문 선고나 되는 것처럼 노무현 정권은 이제 언론교황청으로부터 단죄를 받았으니 잘못을 고쳐야 한다고 설교하는 자세이다.
그러나 IPI의 결의안은 그 채택 배경에 대해서 의문이 없지 않다. 결의안 내용이 사실에 부합한 것인지도 따져보아야 한다. 한국 보수신문 사주들과의 특별한 관계로 잡음이 없지 않았던 프리츠 사무국장이 취임한 이후 IPI는 2년 전 언론사 세무조사 때도 언론기업도 국법 준수에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힌 국제기자협회(IFJ)와는 달리 언론사주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지지해서 언론기업주 이익단체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낸 바 있다.
따라서 이번 IPI 연례총회에서도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에 불만을 품은 언론기업 사주들이 자기들만이 참석한, 동업자들 모임에서 그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너무나 빤한 일이었다. 여기에는 유신정권 때부터 IPI 로비를 맡아온 인사도 사주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렇게 자기들의 일방적 주장을 채택하게 해놓고 이러한 결의안이 채택된 것은 국제적으로 국가적 망신이라고 말하는 것은 공정한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한국의 대표적 신문을 자처하는 신문경영자들이 페어플레이 정신을 버리고 밖에 나가 한국언론의 실상을 왜곡하면서 국가의 이미지에 상처 내고 있는 것이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거대신문들이 하루 빨리 자성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쪽의 이야기만으로
IPI도 한 민주국가의 위신을 크게 해치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할 때는 한쪽의 이야기만을 들어서는 안 된다. 상대편의 입장도 들어보고 사실을 확인했어야 하는 것이 정도이다.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상황을 보도할 때는 반드시 한쪽의 소스에 의존하지 말고 두 개 이상의 소스로부터 사실을 검증해야 한다는 이른바 두 소스의 원칙이 있다. 편파적인 판단을 내릴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한 보도준칙이다. 세계언론의 대표적 기구를 자처하는 IPI라면 언론인의 기본적인 행동준칙쯤은 지켰어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IPI는 최근 대한매일이 창간 2만호를 기념해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한국사람들의 83%가 언론과 정부가 갈등상태에 있다고 느끼고 있고, 신문간에도 보수신문과 진보신문간의 갈등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80%, 신문과 텔레비전간의 갈등을 체감하고 있는 사람이 70%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알고 있다면 이런 갈등관계에 있는 언론-주로 청와대와 조선·중앙·동아간의 갈등이지만-상황을 판단하면서 어떻게 한쪽의 주장만을, 그것도 동업자쪽의 주장만을 근거로 상대방, 그것도 한국 국민이 합법적으로 선출한 정부를 단죄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런 갈등 사실을 모르고 그런 결정을 내렸다면 그 또한 경솔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노무현 정부의 언론정책이 서툰 점이 많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핵심은 이 정부가 취하고 있는 조치들이 과연 언론탄압이라고 단정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제 권력기관이 돼버린 대신문기업들의 특권을 제한하면 그것이 곧 언론탄압이 되는 것인가?
그러면 한국 국민들은 자기들이 보는 신문에 대해서 정부의 탄압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한 번 살펴보자. 역시 대한매일 조사에서 언론자유가 얼마나 실현됐다고 보느냐고 물었다. 이 질문에 국민의 49%가 긍정적으로 답변했으며 부정적인 응답은 28.4%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면 한국 국민 중에서 언론자유가 없다고 보는 사람은 전체의 3분의 1도 안 된다.
간단히 말해서 대다수 국민은 언론탄압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 보도의 정확성을 높이 평가하는 뉴욕타임스도 이 점에서는 의견이 다르지 않다. 이 신문의 하워드 프렌취 기자가 쓴 지난 5월 31일자 기사의 요지를 보자.
"최근 수주일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거의 가차없는 나쁜 뉴스가 쏟아져 나왔다. 대통령과 언론 사이에는 밀월은 전혀 없었다. 이곳에는 대통령에 대해서 두려움 같은 것은 전혀 없다. 국민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다."
프렌취 특파원이 자기 눈으로 보고 쓴 한국의 언론상황이다. 기사 어디에도 언론탄압이 있다는 언급은 없었다. 같은 동업자인 한국언론이 좀 심하다는 것을 차마 직설적으로 논평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암시한 대목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다면 IPI는 어떤 근거로 한국정부가 언론을 탄압하고 있다고 경고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는지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못한다면 IPI는 하나의 전환기를 맞고 있는 한국내의 갈등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그 가운데 어느 한쪽만의 주장을 듣고 신중하지 못하게 다른 한쪽에 큰 타격을 줄 결의안을 채택했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IPI의 명예를 위해서도 중대한 실수가 아닐 수 없다. 또 이러한 결의안을 채택하게 한 한국의 거대신문 대표들도 그 책임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신문 자성 절실한 때
지금 한국신문, 적어도 3대 보수지는 기업으로서는 번영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신문에 대한 독자의 신뢰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한국언론재단에서 매년 실시하고 있는 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신문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는 94년 이래 내리 떨어지고 있다. 2002년도 조사에 의하면 뉴스의 정확도·공정성·신뢰도에 있어서 신문은 텔레비전에 뒤지고 있다. 10점 만점에 정확도와 신뢰도는 5.23과 5.21로, 100점 기준으로 따지면 겨우 50점 수준이고 공정성은 50점도 채 안 된다.
따라서 대한매일 조사에서 국민의 78.9%가 언론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는 것도 신문에 대한 국민의 불신 및 불만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신문의 신뢰도면에서 보면 지금 한국신문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도 일반 국민이 느끼는 인상은 적어도 시장의 75%를 차지하고 있다는 대신문들은 말 실수가 많고 아직 국정운영에 서툰 새 정권, 감히 언론권력에 겁 없이 대드는 대통령을 괴롭히는 데 일종의 쾌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오만이다. 언론권력의 고치기 어려운 고질이다. 그러나 이들 신문을 위해서나 한국의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나 거대신문들은 하루 빨리 자기들의 과오를 자성하고 신문의 정도로 돌아와야 한다.
워싱턴포스트의 언론매체 전문기자인 하워드 커츠는 10년 전인 93년 컬럼비아저널리뷰에 실린 '언론은 왜 항상 옳은가?'라는 글에서 언론매체들이 남에게는 손가락질을 하고 비판을 잘 하면서도 자기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데는 무척 느리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언론계의 고질병을 지적했다.
"언론기관 간부들은 그들의 행동이 공격을 받게 될 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흔히 고집을 부리고 오만을 피운다. 그들은 사과를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구석에 몰리기 전에는 잘못을 시인하기를 거부하고 잘못을 시인할 때도 마지 못해 한다. 간단히 말해서 언론인들은 정치인이나 기업 간부들이 책임을 발뺌한다고 곧잘 비난하면서도 자기들은 바로 이 발뺌의 명수들이다.
언론사 간부들은 자기 신문사나 방송사가 내보낸 말썽난 기사 문제로 전화를 걸면 잘 받지 않는다. 내가 쓴 사소한 비판기사에 대해서도 화를 내고 불평하는 편지를 보낸다. 자기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그 같은 비판기사를 매일 같이 쓰면서도…. 대기업화 한 언론사들은 포춘지에 실린 500대 기업과 행동면에서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실망스러운 일이다."
커츠는 미국 언론매체 변호사협회 회장 스티븐 브릴의 말을 인용, 언론인들의 위선을 고발한다.
"우리는 말도 안 되는 2중 잣대를 갖고 행동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매일 같이 다른 분야 사람들의 책임을 따지면서, 우리 자신의 책임을 묻는 일이 생기면 우리는 '그건 사기에 좋지 않아' 하고 피한다. 우리들 대다수는 위선자들이야."
언론의 무오류 면책권
언론의 오만에 대해서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는 지성인의 한 사람이 프랑스의 메디올로지 학자 레지스 드브레가 아닐까? 그는 언론인을 사제복을 입지 않은 평복 사제라고 부른다. 그는 언론이 정치권력과 싸워 독립을 쟁취함으로써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게 됐고, 하나의 교회가 됐으며, 정보의 당위를 당파정신이나 이데올로기보다 상위에 놓음으로써 언론직을 성직화 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언론의 고귀한 사명을 내세워 언론이 하는 것은 항상 옳고 언론은 잘못하는 일이 없다는 무오류권을 주장하며, 그래서 오만해진다고 분석한다. 교황의 무오류권도 교회에서 교리를 선포할 때에만 적용되는 것인데 언론은 보도의 신속성을 내세워 아무 때나 무오류를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또 언론인은 법복을 입지 않은 판사임을 자처하고 설사 잘못을 저지르는 일이 있더라도 보통사람들의 법정에는 설 수 없다고 생각하며, 성직자처럼 그들만의 법정에서 심판 받을 것을 주장한다고 비꼰다. 다시 말하면 언론인의 잘잘못은 언론인만이 심판할 수 있는 것이며 다른 사람은 참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론인의 자기 잘못을 시인하기 싫어하는 오만을 비판한 것으로 언론인의 자기반성을 해학적으로 촉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는 97년 여름 20세기가 곧 막을 내리고 21세기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 언론이 비판받고 있는 잘못된 점들을 개선하고 당면한 문제점들을 점검하고 다가오는 세기에는 언론이 국민에게 좀 더 충실히 봉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기 위해, 중견 언론인 20여명이 모여 '우려하는 언론인 위원회(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ts)'를 구성했다.
이 모임은 몇 년 사이에 수백명으로 회원이 늘어나 미국언론의 자성을 촉구하고 새로운 행동준칙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스캔들 보도에 탐닉한 신문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떨어지고 있고 독자들은 그들이 읽고 있는 것을 점점 덜 신뢰했다. 독자들은 이전에는 신문이 정치인들을 감시하고 정치를 더 깨끗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그러나 파이낸셜타임스의 리차드 램버트 기자가 지적한 것처럼 공중은 점점 신문이 그들의 정치지도자들이 자기 직무를 원만하게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워싱턴에서 1년간 계속된 르윈스키 스캔들 보도는 언론과 수용자 사이의 단절의 골을 더욱 깊게 했다. 언론이 성급하게 대통령의 축출 가능성을 예언하며 온갖 루머를 확인 없이 보도하고 있는데도, 여론조사 결과 60% 이상의 국민이 대통령이 직무를 계속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은 독자들의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도 이른바 조선·중앙·동아 3대 신문이 노무현의 당선을 막아 보려고 그렇게 노력했어도 그가 당선된 것은, 인터넷의 힘이 신문의 힘을 약화시킨 것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신문에 대한 신뢰가 그만큼 낮아진 것도 한 요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당면한 한국신문의 문제는 조·중·동의 노무현 새 대통령에 대한 증오 보도에 있다고 본다. 그것이 세 신문의 독자층인 보수세력의 여론을 반영한 것이든, 보수신문들과 대기업의 상호간의 타산적 경·언(經言)유착에 원인이 있든, 또는 특정 신문과 노무현 대통령과의 원한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든 간에, 적어도 이 정권 출범 이후의 세 신문의 보도태도에서는 증오의 냄새가 풍긴다.
꼬투리 잡기 보도 경향도 부인하기 어렵다. 신문이 특정 정치인을 미워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는 아니지만 책임 있는 언론으로서 사실의 정확성과 공정성, 보도의 균형을 갖춘 보도를 한다면 동기만을 가지고 언론을 비난하기 어렵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기사에 감정이 섞여 있고 편파적일 때 그것은 언론의 정도를 일탈하는 것이다.
또 매일같이 스캔들로 지면을 메우는 것은 더 중요한 정보를 보도할 지면을 그만큼 줄이는 것이며 올바른 의제설정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발전을 저해하는 불건전한 제작태도라는 것은 언론계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왜 이 간단한 상식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가?
행동으로 옮기는 자성 필요한 때
최근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가 몇 페이지를 할애해서 자기 과오를 반성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한국신문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우리 신문들처럼 창간기념일이나 신문의 날에 형식적으로 독자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입에 바른 몇 마디 자아비판을 읊고는 곧 잊어버리는 자성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는 진지한 자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같은 자성이 절실히 필요하다. 르몽드도 지난 봄 자기 신문의 치부를 폭로한 책 '르몽드의 감춰진 얼굴'이 나왔을 때 저자들의 악의 여부를 떠나서 며칠씩 전 기자들이 자성의 광장을 갖고 새로 태어날 몸부림을 치지 않았는가? 뉴욕타임스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적인 권위지들이 이렇게 진지한 자성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우리 신문들은 왜 고뇌의 몸부림이 없는가?
노무현 대통령의 언론 접근방법에도 문제가 있다. 그가 시정해야 할 점도 많다. 그러나 지금 국민의 관심은 노무현과 조·중·동 싸움에서 누가 이기느냐에 있지 않다. 언론의 자성은 노무현이 나오기 전에 있었어야 할 일이었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다. 신문들이 고질인 권력남용과 오만을 반성하고 일찍 자성의 기회를 가졌더라면, 오늘의 노무현-보수언론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IPI 결의안에 들떠 자성의 때를 놓치지 말기를 촉구한다.
신문협회는 당장 신문 신뢰 추락의 원인 규명회 같은 것을 구성해서 원인 제거방안을 강구하고, 그리고 당장 실천에 들어가야 한다. 만약 신문이 자성하지 않고 오늘의 오만한 태도를 고치지 않을 때 이미 시작된 독자들의 항의운동이 더욱 거세지게 되리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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