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빛 하늘 아래서 시를 썼습니다

백일장에서 장원을 받았습니다

등록 2003.10.05 11:12수정 2003.10.05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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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에 이사온 지 40일 되는 날(토) 서오릉에서 백일장이 있었습니다.

서오릉은 고양시에 위치한 조선왕릉입니다. 경릉 창릉 명릉 익릉 홍릉으로 5릉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익릉은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묘지랍니다. 숙종 원년에 왕비가 되었으나 20세에 승하하여 서오릉에 묻혔다고 합니다. 그 안에서 시를 썼습니다

왕조의 흥망성쇠는 간데 없고 물달개비들이 가을 바람에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는 바람결에 몸을 비틀며 은행을 두두 떨어뜨리고 있었습니다.

보랏빛 쑥부쟁이들이 하늘거리는 숲 속 그늘은 춥기도 했습니다. 푸른 잔디는 가을 청자 빛을 받으며 여유롭게 누워 있었구요. 그늘과 햇볕이 공존하는 곳에서 불편하게 시를 쓰면서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렸습니다.

덜 여문 잎들이 바람에 맞춰 머리 위에도 커피 잔 위에도 원고지 위에도 우수수 떨어지던 순간에 느꼈던 살아 있음은 정말 행운이었습니다.

가을이나 쓸쓸함의 주제로 연시를 쓰고 싶었는데 글제가 '대통령, 태풍, 인터넷 감'이라서 태풍을 주제로 택했습니다.


접수번호를 쓰고 이름도 없는 제목과 본론이 바로 들어가는 공정한 상, 이런 상이 너무 깨끗하고 행복함을 줍니다.

야심한 시각(밤 11시)에 심사가 이제 끝났다고 축하 전화를 해 주셨습니다. 시낭송의 영광까지 덤으로 안았습니다. 가슴에 차 오르면 절실한 시가 된다는 그 말이 하루종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하루였습니다.


이젠 백일장은 졸업입니다. 그간 여러 차례 장려상에 머물던 제가 장원이라니 정말 기쁘고 가뿐합니다.

부족하지만 시를 올립니다

성난 손님

...매미를 보내며...


-김영

방파제 갯 풀들은 위태로이 술렁이고
새들은 바람보다 빠르게 날개를 접었다

비무장지대 민들레를 닮은
사람만이
바람의 기별을 알지 못하고
가쁘게 넘실대는 바다의 손님을
온 몸으로 맞았다

거칠고도 서러운 폭발들이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선언했다

육지를 침범한 그들은
선량한 농부의 알곡을 강탈하고
바다를 점령한 그들은
건장한 어부의 심장을
두부처럼 으깼다

은밀한 숲 속에 걸터앉아
사슴의 뿔을 넘보았다
말 못하는 돼지는
잠수가 서툴러
눈물을 흘리며 가라앉았다

성난 바람의 갈기에 춤추는 마을
거대한 이국의 뗏목은
세상의 집들을
세상의 평화들을
바람의 이름으로 부숴버렸다

그러나
7년 묵은 매미의 껍질은
사람만이 가진
희망이라는 비밀암호를
끝내 풀지 못했다

소리 내지 않는 깊은 강물처럼
엎드린 자의 분노를
새벽 별처럼 쏟아져 내리는
다사로움을
그들은 미처 풀지 못했다

진흙탕 속 벼를 세우고
엉킨 그물을 손질하고
어린 손들은 저금통을 보태고
희망의 심지를 밝히는 오늘

은빛 꼬리로 물살을 치는 어장이
살아 꿈틀거리고
청아한 하늘에선
눈부신 빛들이
쉬지 않고 내려온다

다시 그물을
던져야 할 시간이다

(제7회 은평백일장 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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