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목회와 나의 어머니

박철의 <느릿느릿 이야기>

등록 2003.10.10 09:04수정 2003.10.1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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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우리 교회 남선교회 봄 나들이

우리 교회 남선교회 봄 나들이 ⓒ 느릿느릿 박철

신학교 시절,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비판적인 시기에, 내가 과연 앞으로 목사가 될 것인가 말 것인가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느님의 일을 꼭 목사가 되어야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솔직히 목사의 길을 피해가고 싶었다.


나는 젊음이라는 무기로 철저하게 무장한 채 방황과 객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 때 만큼 내 인생에 있어서 진지했던 적이 없었다. 당시 내 사고는 경직되어 있었다. 당시 사회의 구조악과 모순에 눈을 뜨면서 더 이상의 방황을 끝내고, 차라리 목사가 되어 이 사회의 변혁에 동참하는 것이 하느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학교 3학년 때 나는 내 삶의 돌파구로 '농촌 목회'를 선택했다. 그 때 결심이 나는 평생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 맘몬과 바벨로 혼재된 오늘의 한국 교회로부터 참다운 목회의 모범을 만들고 싶었다. 나를 아끼던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시 목회의 길(교회개척)을 권유받기도 했고,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한 교회도 있었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농촌으로 내려갔다.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어느 덧 농촌목회 19년째에 접어들었다. 처음 내가 가졌던 생각대로 농촌을 한번도 떠나지 않았다. 그 동안 교회를 세 번 옮겼는데, 세 교회 다 농사 외에는 부업거리가 전혀 없는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다. 그러면 신학교 시절, 내가 하느님께 기도하고 나 자신에게 약속한대로 지금 살고 있는가? 아무리 점수를 후하게 주어도 50점을 줄까 말까이다. 60점 이하가 낙제이니, 나는 낙제 목사다.

농사짓는 목사 되겠다고 결심했는데, 땅이 없으니 남의 땅을 빌려 오리논 논농사를 조금 지어 보았다. 시늉만 낸 것이다. 트랙터로 논을 갈고 콤바인으로 털고 하는 건 다 교인들 손에 맡겼으니 오죽하겠는가? 오리 밥 주러 다니고, 논에 퇴비 넣어주고, 호미 들고 들어가서 김 매주는 게 고작이었다. 논 한 배미 빌려서 농사랍시고 짓는데 하루에도 대여섯 번 논에 나간다. 논에 하루 대 여섯 나가 보는 것을 사람들은 ‘논에 나가 산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a 우리교회 성가대원들과 함께 교회 앞에서

우리교회 성가대원들과 함께 교회 앞에서 ⓒ 느릿느릿 박철


하루는 장로님 한 분이 찾아오셔서 “목사님 농사 그만 두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어렵게 말씀을 하신다. 교인들 집 농사를 거드는 것도 대단히 조심스럽다. 50여 가구 되는 가정을 다 도울 수 없다. 어차피 선택을 해야 한다. 일손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아예 교인이 아닌 집을 돕는다. 그런데 그렇게 농사를 거들다 여러번 오해를 받는다.


목사가 농민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농사시늉 하기도 어렵다. 요즘도 텃밭을 가꾼다. 마늘, 상추, 강낭콩, 파, 감자, 가지, 토마토, 땅콩… 등등 종류도 여러 가지다. 제초제를 안 주니 풀이 엄청나다. 장마철 비 온다고 잠시만 내버려두어도 완전 풀밭이다. 김매는 일은 거의 아내 몫이다.

농사꾼이라지만 완전 낙제 농사꾼이다. 그리고 농촌에서 살면서 교회의 새로운 모델, 이상적인 모범을 만들어 보겠다고 결심했는데, 별로 큰 성과가 없다. 그러니 얼치기 목사임이 틀림없다. 그래도 나는 농촌이 좋다. 흙이 좋고, 들이 좋고, 산도 좋고, 나무도 좋고, 풍경이 좋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사람이 제일 좋다.


내가 목회도 신통치 않게 하면서 가는 교회마다 최 장수 목회를 했다. 나를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그렇긴 하지만…. 내 설교 주제의 절반은 ‘감사’다. 언제인가 컴퓨터 기록장치에서 내 설교를 참고하기 위해 키워드로 ‘감사’라는 단어로 검색을 했더니, 설교의 절반 이상이 감사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내 생활에 ‘감사’가 없기에 아니면, 교우들이 ‘감사’에 인색한 삶을 살기에 ‘감사’라는 설교를 자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강요된 어거지 감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감사’를 생활화하면 할수록 공짜로 생기는 보너스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사’가 부족하다.

a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 느릿느릿 박철

목회하면서 늘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23년 전 하느님 부름을 받고 가셨고,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는 일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목회하면서 그게 생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교회 옆, 허름한 오두막집을 돈을 주고 사서 입식으로 개조해서 어머니가 거처하실 집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대단히 만족해 하셨다. 장로님들을 비롯해서 온 교우가 환영해 주셨다. 참으로 고마웠다.

그런데 5년 전, 어머니가 대구에 사는 동생네 집에 가셨다 쓰러지셔서, 척추수술을 했는데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그 후유증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신다. 그것이 제일 안타깝다. 나의 어머니는 보행을 못하신다. 워커를 잡고 간신히 방에서만 왔다 갔다 하신다. 그래도 신앙의 힘으로 늘 밝게 사신다. 참 감사하다. 나는 어머니의 신앙을 절반도 못 따라간다.

문제는 어머니와 생각이 맞지 않을 때가 가끔 있다는 점이다. 나는 농촌 목회를 감사하고 만족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나의 어머니는 도시교회의 대형 목사들을 은근히 부각시켜 말씀하실 때가 계시다. 일테면 도시교회 큰 교회 목사들은 목회에 성공한 것이고, 훌륭한 목사라는 것이다. 요즘 기독교TV가 생기면서 어머니는 낮에 혼자 지내시기가 무료하니 주로 기독교TV방송을 보시며 소일하신다.

거기서 얻은 걸러지지 않은 정보는, TV에서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어머니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와 충돌하게 된다. 다 내가 못난 탓이다. 우리 어머니는 공부는 많이 하신 분이 아니지만 지혜롭다. 말씀도 잘 하시고, 기도도 잘 하신다. 어머니는 장남에 대한 기대가 20년 동안 농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맨 날 세월아 네월아 하고 사는 내가 무능한 존재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가끔 어머니가 전화를 하신다.

“오늘, 박 목사 설교가 너무 은혜롭고 좋았어, 어휴 설교가 아까워, 서울 같은 도시 큰 교회에서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설교 잘한다고 알아줄 텐데….”


어머니의 마음을 안다. 어머니가 내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고 하시는 말씀을, 또 어머니의 기대에 내가 미흡하다는 것을 잘 안다. ‘나는 시골교회가 좋다’하고 어머니는 ‘시골 교회가 성이 안 차신다.’ 기왕이면 크 교회 목회하길 바라신다. 이것이 어머니와 나의 문제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어머니와 충돌하면 참 마음이 아프다.

a 어머니가 사시는 집. 마당에 감나무가 하나 있다

어머니가 사시는 집. 마당에 감나무가 하나 있다 ⓒ 느릿느릿 박철

어머니가 기분이 좋으면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환한 표정을 지으신다. 조금 속상하면 얼굴이 금방 어두워지신다. 어머니의 속내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또 나는 내 식대로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어머니와 부딪히게 된다. 낙제 목사에 낙제 아들이다.

그러나 나는 농촌교회가 좋다. 그리고 어머니가 좋다. 그것은 변할 수 없는 나의 속마음이요, 진실이다. 앞으로 얼마나 농촌에서 더 살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농촌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하느님이 나를 어디로 이끄실지 모르지만.

사기치는 목사가 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왜 자꾸 약장사 같은 목소리로
과장을 하게 되는 걸까?
다정다감한 목사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왜 무뚝뚝하고 내가 보기에도 험한 인상으로
사람들을 대하게 되는 걸까?
양떼들을 진심으로 아끼며 돌보는
선한 목자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왜 건성건성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하느님 눈치 보며 살아야지 하면서도
사람 눈치 보다가 사람 꾀임에 빠져
골탕먹고 마음 상해 하는걸까?
돈에 욕심없는 목사가 되어야지 하면서도
결국은 속물근성의 인두겁에서 벗어나
자유롭지 못한 걸까?
연하디 연한 쑥처럼 고요한 성품을
가져야지 하면서도
왜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성깔을 내고 요란하게 되는 걸까?
아, 빈듯하여라
허한 게 속이 빈 듯하여
아, 영락없는 나는 낙제 목사다
얼치기 목사다.
(박철. 낙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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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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