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그랬어>, 뭐라고 했는데?

<아웃사이더> 김규항, 어린이를 위한 정통 교양 만화잡지 창간

등록 2003.10.12 18:56수정 2003.10.23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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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잘 하고 싶었지만 잘 안됐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기가 어려울 것 같다.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저 세상에 가서 똑같이 해주겠다. 하지만 그 동안 잘 해준 친구가 고맙다”

“죽고 싶을 때가 많다. 어른인 아빠는 (이틀 동안) 20시간 일하고 28시간 쉬는데 어린이인 나는 27시간 30분 공부하고 20시간 30분을 쉰다. 왜 어른보다 어린이가 자유시간이 적은지 이해할 수 없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작년 11월, 초등학교 6학년생 두 명이 남긴 유서다. 어른들이 살기 힘든 세상, 아이들 역시 살아내느라 고달프다. 몸이 병들고, 마음이 무너진다. 경쟁과 폭력, 상업과 물질에 찌든 이 아이들을 어쩔 것인가.

“모든 가치를 돈으로 매기는 몹쓸 상업주의 문화가 하루가 다르게 우리 삶과 정신 속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이 사랍답게 사는 일,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일을 배우거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찌감치 무한경쟁의 바다에 내던져집니다. 이 아이들을 어쩔 것인가? <고래가 그랬어>는 그런 고민을 담아 만듭니다.”(창간 안내글 중)

a <고래가 그랬어> 창간호 표지

<고래가 그랬어> 창간호 표지 ⓒ (주)야간비행

<아웃사이더> 편집주간을 지낸 김규항씨가 펴내는 어린이 교양 월간지 <고래가 그랬어>((주)야간비행)가 지난 10월 1일 창간했다.

<새소년>이니 <소년중앙> 같은 어린이 월간지들이 폐간한 지 20여 년 만이다. 기존의 어린이 잡지가 “종이잡지의 정체성을 잃고 다른 종류의 미디어에나 어울리는 내용을 어설프게 흉내내다가 자멸했다"고 평가하는 <고래가 그랬어>는, 다부지게도 ‘정통 교양’을 표방한다. 인권과 평화, 양성평등, 미디어 비판, 친환경 심지어 수학과 철학까지,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필수 영양소를 고루 갖추어 놓았다.

물론 제 아무리 ‘전인 양성’에 도움이 되어도 재미가 없으면 아이들 발에 채이기에도 황송할 뿐. 그래서 <고래가 그랬어>는 ‘만화라는 그릇’을 사용한다. 실제로 잡지의 3분의 2이상이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총천연색 만화 연재물이고, 20여 개가 넘는 다른 꼭지들은 물론 별책부록까지 만화의 장점을 충분히 살렸다.


전태일의 일생을 그린 <태일이>(글 박태옥, 그림 최호철)는 독자를 훈계하는 멘트 하나 없이도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요즘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서정적인 최호철의 그림은 한 컷, 한 컷 버릴 것이 없다.

<비빔툰>의 홍승우씨는 <신세기 소년 파브르>를 그린다. 욕심꾸러기 인간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곤충들을 살리기 위해 버그 은하계 ‘곤충성’에서 급파한 복제소년 파브르의 모험을 담은 이 작품은 도시 아이들에게 곤충에 대한 정보는 물론 자연을 존중하는 마음도 가르친다.

못생긴 얼굴 때문에 왕따를 당하다 한을 품고 죽은 열무 낭자와 밥 많이 먹는다고 쫓겨난 알타리 총각이 ‘유도비아’를 찾아 떠나는 <열무낭자>(글 조은수 그림 유승하)는 여성에 대한 갖가지 편견과 폭력을 조금씩 깨뜨려나간다.


인권운동사랑방이 쓰고 윤정주가 그린 <뚝딱뚝딱 인권 짓기>는 어린 독자들에게 ‘당신이 가진 인권’을 가르쳐 줄 것이다. 이번 창간호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전쟁’에 관해 이야기한다. ‘전쟁은 왜 무서운 걸까?’, ‘전쟁은 왜 일어날까?’, ‘정말 전쟁이 필요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소제목들은 <고래가 그랬어>의 지향과 의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저마다 개성이 넘치는 만화들 사이에는 재활용 쓰레기로 장난감을 만드는 <퉁퉁이 아저씨의 얼렁뚱땅 공작교실>(구성 현태준), 직접 요리에 도전하면서 화학 조미료와 인스턴트 식품을 멀리하는 식습관을 기르기 위한 <알콩이와 달콩이의 보글보글 부엌>(글 편집부, 그림 홍시야),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는 주인공과 수학을 못해서 자살한 귀신의 만남을 그린 <수학의 가치와 그 효용성>(글·그림 강무선) 등 깊이있는 고민과 반짝이는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뿐만 아니라 거대 자본의 횡포(<나쁜 장사꾼들>-“햄버거 속엔 뭐가 들었어?”), 빈익빈 부익부 현상(<고정관념을 깨면 아플까?>-“부자 나라의 국민은 행복할까?”)처럼 ‘심오한’ 주제는 오히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열두살 짜리의 절규에 귀기울이는 세상을 위해, 물고기처럼 자유로운 아이들을 위해, 갓 출발한 <고래가 그랬어>의 몫이 큰 것은 당연하다. 사실, 어찌 보면 진작 나왔어야 할 잡지가 아닌가.

고래가 그랬어 184호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지음,
고래가그랬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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