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에 필요한 거면 뭐든지 만들어내죠"

[새벽을 여는 사람들 43] 드라마 소품팀장 장영창씨

등록 2003.10.14 08:51수정 2003.10.15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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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벌써 세 번째 장소다. 아침 8시 이태원에서 시작해 마포를 거쳐 지금은 여의도의 한 공원에서 촬영 중이다. 오늘 촬영할 장면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비가 내린다. 한참 촬영에 열중하는 스태프와 달리 저만치 앉아 비를 피하고 있던 장영창(32)씨에게 누군가 다가가 말한다.


“배가 필요할 것 같아요.”

그는 주말 드라마 ‘태양의 남쪽’의 소품 담당 팀장이다. 원래 오후 6시에 잡혀 있던 촬영 스케줄이 전날 새벽 갑자기 오전 8시로 바뀌는 바람에 잠도 제대로 못자고 나왔다. 하지만 이제 방송 경력 7년 차인 그에겐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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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소품을 담당하죠. 하물며 대본에 나오는 장소가 적당한 게 없으면 대본에 맞게 직접 꾸며야 하는 경우도 있고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스태프의 말을 빌자면, 못 만들어내는 것이 없다고 한다.

“스튜디오 촬영은 집이 나오잖아요. 그럼 연기자의 색깔에 맞게 가구색깔도 맞아야 해요. 처음 시놉시스가 나오면 연기자의 성격부터 먼저 파악해야 해요. 때문에 저는 대본이 나오면 정말 오랫동안 읽어요.”

현재 ‘태양의 남쪽’ 의 스태프는 40여 명, 그 중 소품 담당은 그를 포함해 3명이 있다. 7년 차인 그를 제외한 나머지 두 명은 경력이 1년이 채 되지 않는다.


“원래대로 하자면 7년 차인 제 밑에 3~4년 차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다 1년도 안된 애들이에요. 일이 힘들다보니까 이틀 밤새고 나면 안 나와요. 3개월을 못 버티는 경우도 허다해요. 다른 스태프는 11시에 시작하면 10시쯤 나와요. 그런데 우리는 7시부터 나와서 준비해야 하거든요. 촬영이 다 끝나도 소품 정리 때문에 가장 늦게 끝나요.”

최근 5년 동안 그는 명절에 단 한 번도 고향인 대전에 가지 못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단 하루 무덤만 찾아갔을 뿐이었다. 이번 드라마도 처음 한 달간은 거의 밤샘 촬영이었다. 일주일을 통틀어 5시간을 잤다니 할 말 다했다. 자는 것도 차에서 이동하며 자는 게 전부란다. 오죽하면 집에서 자는 게 불편할 때가 있다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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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소품은 한 개만 준비해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여유분을 항상 준비해야 한다. 얼마 전에도 소품으로 준비한 케이크가 말썽을 나 혼쭐이 났다.


“2단 케이크가 소품으로 쓰였는데 스태프가 들고 오다가 계단에서 떨어뜨린 거예요. 새벽 1시였거든요. 정말 강남 역을 다 돌았어요. 가게 문도 닫혔는데 두드려서 겨우 겨우 크기만 다르고 모양이 같은 케이크 두 개를 샀어요. 그래서 두 개를 합쳐서 2단 케이크를 만들었죠. 나름대로 진짜 같던데요.”

한번은 위조지폐를 만든 범죄자로 몰린 적도 있었다.

“수백 장의 수표를 찢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진짜 수표를 찢을 수 없으니까 가짜를 만들어서 사용해야 하잖아요. 직접 다 만들어서 촬영을 하고 남은 것을 소품실에 두었는데 누군가 가져간 거예요. 그런데 가짜니까 버렸는데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발견하시곤 경찰서에 신고를 했어요. 수표에는 제 이름이 써 있으니까 경찰서에 가서 조사 받았죠. 대본 들고 가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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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지난 7년 동안 그는 모두 6개의 미니시리즈에서 소품을 담당했다. ‘토마토’, ‘아름다운 날들’, ‘수호천사’ 등에서 많은 연기자와 함께 일하며 가장 인상에 남는 연기자로 최민수씨를 꼽았다.

“민수형은 정말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자에요. 최고의 연기자죠. 그리고 정말 남자에요. 강한 사람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약해요.”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최민수씨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했다.

최민수씨는 “스태프들이 정말 고생이 많다”며 “나는 매우 깐깐한 사람인데 영창이가 잘했고 참 고맙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최민수씨가 생각하는 스태프와 배우와의 관계는 무엇일까?

“배우는 무대 위의 액터(actor)이고 스태프는 무대 밖의 액터(actor)입니다. 나는 보여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고 스태프는 숨을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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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촬영 중에 비가 내리자 그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가 비를 피했다. 그 역시 차안에서 촬영이 속개되기를 기다렸다. 불쑥 창문이 열리더니 돌돌 말린 포스터 한 장이 들어왔다. 알고 보니 모 기업의 홍보 포스터다. 드라마가 방영될 때 시청자가 잘 볼 수 있게끔 어딘가에 붙여 달라는 뜻이다.

“솔직히 회사입장이 이해는 가요. 돈을 들였으니 어떻게 해서든지 광고효과를 보고 싶겠죠. 하지만 이렇게 기업 이름이 그대로 나오는 건 안 되죠. 이런 것은 단호히 거절해요.”

그는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 현실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시청률 지상주의’를 꼽았다. 드라마의 내용이 중간에 바뀌기도 하고, 길이도 늘었다 줄었다 한다.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시청자의 의견은 소중하지만 그래도 소신 있게 그동안 해왔던 대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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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소품 담당자로서 바라는 점도 있다. 어서 빨리 이동식 스튜디오가 완성이 돼 부수었다 지었다 하는 일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세트 하나를 지으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스튜디오는 한정돼 있으니까 세트를 부쉈다가 다시 짓고 그것을 반복해요. 그러다 보면 사용되는 소품이 굉장히 많이 망가져요. 다른 방송사들은 이동식 스튜디오를 모두 가지고 있고 저희는 지금 짓고 있어요.”

그날 촬영해 그날 방영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한 것이 우리나라 드라마 제작의 현실이다. 특히 미니시리즈 같은 경우는 더욱 더 그렇다. 그는 심지어 많게는 하루에 55개의 장면을 촬영한 적도 있다.

“솔직히 하루에 55개를 찍으면 거기에 들어가는 소품을 일일이 챙길 수가 없어요. 섬세하게 들어가질 못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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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오늘 꼬박 13시간을 촬영했다. 하루 종일 촬영한 것이 방송에 나가면 15분 정도란다. 14회까지 방송이 나간 현재 드라마의 촬영은 이번 주까지다. 단막극, 오픈 드라마까지 합하면 50여 개의 드라마를 담당했던 그지만 매번 드라마가 끝나고 난 후의 허전함은 여전히 견디기 힘들다고 한다.

“어떤 드라마가 끝나든지 아쉬워요. 전 드라마는 못 보지만 대본이랑 녹화해 놓은 비디오 테이프는 다 가지고 있어요. 꼭 그런 느낌 같아요.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이 자식들이 찾아왔다가 다시 떠나보내는 기분이요. 그래서 전 처음엔 쉽게 다른 드라마에 적응하지 못해요. 드라마가 끝나면 협찬받았던 것을 돌려줘야 하거든요. 그때는 막 실감이 나면서 정말 우울증까지 생길 정도라니까요.”

하지만 이번 드라마가 끝난 후 그에게는 꿀맛 같은 10일간의 휴가가 주어진다.

“한 3일은 푹 자고 나머지는 고향에 내려가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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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석

“어느 순간 서른 살이 됐어요. 아까도 말했지만 일년에 드라마 3개 찍으면 후딱 지나가요. 그리고 부모님께 도리를 못했다는 거죠. 아버지가 편찮으시다고 해도 전화 드릴 시간이 없어서 전화도 못 드렸어요. 그리고 일 시작하고 현재 13kg이 빠졌어요.”

일을 시작하고 잃었다고 생각하는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가 청산유수처럼 말을 쏟아낸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저 체질에 맞고 천직이란다.

“재밌어요. 여러 사람들 만나는 것도 좋고 일도 재밌고. 제 체질에 정말 맞아요.”

그에게 소원이 있다면 소품 담당이 드라마 제작에 있어 하나의 독립된 역할로 담당하는 것이다. 지금은 연출자의 지휘아래 진행되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에게도 스태프와 배우의 관계를 물었다.

“스태프는 연기자를 빛나게 해주는 사람이죠. 그리고 연기자는 스태프가 만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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