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떠난 아들에게 쓰는 편지(8)

흙으로, 바람으로 돌아가다

등록 2003.10.17 00:27수정 2003.10.17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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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아들에게


엊그제 온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날씨가 제법 싸늘해졌구나. 강원도 고산 지대엔 올 가을 들어 예년보다 훨씬 이르게 눈발이 흩날리기도 했다는 보도가 있기도 했지. 무심한 세월처럼 자연의 변화도 무심하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가는 것만 같구나. 따가운 햇볕 아래 땀을 흘리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벌써 겨우살이를 걱정해야 하는 그런 철이 되었으니 말야.

창 밖으로 보이는 느티나무의 잎사귀들은 여름날의 무성했던 푸름을 뒤로하고 어느 새 누르스름한 옷으로 갈아입을 준비를 하는 듯하구나. 그러던 중에 느닷없이 그 차가운 비를 맞았으니 그들은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니. 아직은 더 가지에 붙어서 해야 할 일이 남았을 텐데, 야속하게도 빗물과 바람이 어서 떠나라고 재촉을 해 대니 그런 서운함과 섭섭함이 어디 있겠느냐.

하지만 나뭇잎들이 제 아무리 떠나기 싫다 해도 어찌 저 비바람의 강인한 기세를 거스를 수 있겠느냐. 바람의 힘과 빗물의 무게를 못 이겨 하릴없이 삶의 뿌리였던 가지와 마지못한 작별을 한 잎새들이 땅에 떨어져 내뱉는 신음 소리가 내 가슴을 아프게 파고드는구나.

저 신라의 월명사라는 스님께서는 그 신분이 승려였음에도 속가(俗家)의 누이동생이 세상을 떠나자 절절한 애도의 마음을 한 수의 노래로 읊으셨지. 그 시에 이런 구절이 있는 걸 너도 기억하리라 생각한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같은 가지에 나고서도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

같은 가지에 나란히 난 나뭇잎들은 같은 부모님 밑에 태어난 형제들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그 나뭇잎들이 생겨난 순서에 관계없이 가을 이른 바람에 떨어지고 있으니, 즉 자기보다 어린 동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그 오라비 입장에서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니. 비록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삶과 죽음의 고통을 벗어나려는 불도(佛道)를 닦고 있는 입장이라 해도 피붙이의 때아닌 죽음에 미어지는 슬픔을 이기지 못해 이런 추모의 시를 지어 그 영혼을 위로한 것 아니겠니.


바람에 흩날려 뒹구는 나뭇잎들을 보며 우리 삶이 어쩌면 바로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마치 네가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길을 홀연히 떠나야 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은 언제, 어떤 일에 부딪칠지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니겠니. 모진 바람과 감당 못할 만큼의 빗물 무게가 아직 멀쩡한 잎을 그 어미로부터 강제로 떼어내 땅에 내팽개치는 것 같은 폭력(죽음)이 우리 삶의 곁에 상존(常存)하고 있는 듯하구나.

내가 예전 고등학교에 다닐 때 배웠던 글 가운데 안톤 슈낙이란 외국 사람이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게 있었단다. 센티멘탈리즘을 극대화시킨 그 글은 사춘기를 갓 넘긴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는 내용이었지. 그래서 우리는 그 글을 즐겨 외우고 가끔 대화에 인용하기도 했었는데, 그 속에 내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다만, '우리는 늘 죽음의 심연(深淵) 곁에 서성이고 있다'는 구절이 들어 있었던 것 같구나.


우리는 보통 죽음이라는 걸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며 회피하고 싶어 하지만, 그것은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살아 있다는 또렷한 증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 않니. 죽음은 결코 삶과 상대되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우리 생생한 삶 속에 늘 함께 하는 친숙한 반려(伴侶)라고도 생각되는구나. 생멸(生滅)이 일여(一如)라는 옛 스승님들의 가르침이 엉뚱한 말장난이 아니라 그 말 그대로 움직일 수 없는 진리를 나타낸 교훈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겠니.

그 날, 네가 다니던 학교에서 여러 분들의 오열과 애도 속에 마지막 영결 의식을 치른 다음 난 너와 함께 시립 장묘사업소라는 데로 향했단다. 영안실에서 널 어떻게 떠나 보내야 할지 상의들을 할 때, 난 선뜻 화장(火葬)을 하겠다고 말했지. 그게 진정 널 위한 일인지, 그렇지 아닌지는 알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묘지를 만들어 매장을 하는 일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뚜렷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란다.

허깨비 같은 형상만 남은 난 나무토막처럼 차에 실려 네 뒤를 따랐지. 장묘사업소에 도착하여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네 순서가 되더구나. 슬퍼하고 말 겨를도 없이 사무적이고 기계적인 인부들에 의해 네가 잠들어 있는 관이 내려지고, 곧 캄캄한 입구로 들여 민 다음 철커덩 하고 쇠로 된 문이 닫혀 버리더구나. 아, 어쩌면 그리도 무정할 수 있단 말이냐. 스물 여섯 해를 내 아들로 살아온 네가 이리도 허망하게 사라져야만 한단 말이냐. 눈앞이 깜깜하고,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고, 산천초목이 모조리 그 숨을 잃어버리는 듯한 시간이더구나. 난 사람들에게 붙들려 간신히 유족 대기실로 올라와 쓰러져 버리고 말았지.

넌 짧은 시간 동안에 사람의 형상을 벗고 몇 줌 재로 순식간에 변해 버리고 말았구나. 본래 우리의 몸이란 게 얼마간의 불과 바람과 흙과 물로 이루어진 것이라지만, 그렇게 따로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요소들과, 그것들이 잘 어울려 사람이라는 형상과 생명이라는 힘으로 존재할 때의 차이라는 게 얼마나 크더냐. 아무리 허망한 것이라 해도 그 사대(四大)가 각리(各離)하여 찰나에 하얀 가루 몇 줌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게 과연 믿을 수 있는 일이었겠느냐. 불과 이틀 전만 하더라도 생생하게 삶을 향유하던 몸이 어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냐.

네 무덤을 만들지 않기로 한 내 결정은 우리 전래 풍속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묘지를 만들지 않은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게다. 무덤을 만들어 놓아봤자 누가 있어 나중에 그 묘지를 관리하고, 기일이나 명절에 그 묘 앞에 술 한 잔, 음식 한 가지나마 올릴 수 있겠니. 불과 얼마 안 가서 묘지 위에는 풀이 무성하고, 무덤 속으로는 나무 뿌리가 침범하겠지. 그렇게 볼썽사납게 되면 당사자는 물론 남은 사람들 마음이 편안할 리 있겠니.

얼마 후엔 나도 죽게 되겠지. 난 내가 죽고 난 후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을 할 생각이다. 묘지가 만들어진다면 누가 시절 따라 그 묘를 가꾸고 돌볼 수 있겠느냐. 그 일을 맡아 해야 할 네가 떠난 마당에 필경 얼마 못 가서 주인 없는 묵묘가 될 게 뻔하지. 하물며 너의 무덤은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어느 야산 자락에 천덕꾸러기 묘지가 되어 산짐승들의 쉼터나 되고 말겠지. 또한 요즘 우리나라엔 묘지가 넘쳐 나서 묘지 공화국이라는 말까지 생겨났는데, 그래서 뜻 있는 많은 분들이 유언으로 화장을 부탁하고 있는 추세인데, 거기에 임자 없는 무덤을 하나 보탤 이유가 뭐겠니.

지난 권위주의 독재정권 시절에 수사기관에 끌려가 물 고문을 당하다가 비명에 스러져 간 박종철이란 청년이 있었는데, 지금도 내 뇌리에 선연한 장면은 그 아버지가 아들의 유해를 화장하여 강에 뿌리면서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할 말이 없대이' 하는 처연했던 광경이란다.

그런데 그 후 민주화 투쟁 가운데서 그를 위한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지고, 여러 행사를 하다가 보니 마땅한 장소가 없어 나중에 결국 초혼(招魂)을 하여 무덤을 만들었다는 소식이 있더구나. 그런 걸 생각하면 내가 화장을 선택한 것은 분명 나중에 후회할 일인지도 모르지. 정말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마음을 안정할 수 없을 때에는 네 무덤이라도 있다면 거기로 달려가 그 흙이라도 만지며 실컷 울고라도 싶은데, 이 세상 아무 데도 찾아갈 곳조차 없어 더욱 가슴이 아리단다. 물론 박종철 같은 사람과 너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는 일이다만, 무덤만 놓고 봤을 때는 그런 생각이 든다는 말이지.

처음에 화장을 결정했을 때 난 학교에서 네 영혼을 위로하는 추모비를 세워 주면 네 유해 가루를 그 비 주변에 뿌리거나 그 밑에 묻고 싶다고 생각했고, 학교 관계자에게 그 얘길 했었지. 그들도 크게 반대하지는 않으시더구나.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해를 뿌리는 것은 현행의 법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신성한' 학교 교정에 유분을 뿌리게 할 수는 없다는 분위기로 바뀌면서 난 갈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어디 납골당에라도 모셔야 할지, 아니면 고향 선산에 시늉만이라도 묘지를 만들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하고 고민을 해야 했지.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결정한 것은 이왕 '깨끗하게' 화장을 한 마당에 그런 후속 절차가 뭐가 필요한가, 아무 흔적 없이 자연에서 온 그대로 자연으로 고스란히 돌려보내자, 이런 마음이었단다.

그런 결정을 한 데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난 중국의 최고 지도자였던 등소평이란 사람이 그 유언대로 시신을 화장하여 비행기를 타고 그 유해 가루를 공중에서 뿌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게 했다는 사실, 올 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가장 충청도다운 소설을 썼다는 평가를 받는 유일무이한 작가 이문구 선생의 시신 역시 유언대로 화장되어 그의 고향 뒷산 관촌 마을에 몇 줌의 유해로 뿌려진 사실 등이 크게 작용을 했지. 나도 그 의식(儀式)에 참여했었지만 그 분이 묘를 만들만한 몇 평 땅이 없었겠느냐, 그만한 돈이 없었겠느냐.

결국 우리는 고향 선산을 찾기로 했지. 명절 때마다, 혹은 네가 대학에 합격하거나 큰 일이 있을 때마다 너와 함께 찾아와 조상들께 고하곤 했던 그 선산이 이젠 너의 영원한 안식처가 될 줄을 누가 알았단 말이냐. 이렇게 빨리 그 시간이 올 줄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었겠느냐. 어린 네 동생이 영정을 모셔 들고, 네가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함께 한 너의 실험실 동료들이 네 유해를 들고 산으로 올라갔지.

아버님 산소에 도착하여 나는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향해 울부짖듯 대들면서 한 마디를 하고 말았단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왜 이렇게 빨리 데려 가셨어요?' 그래봤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 일이겠니. 그저 내 막막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기 위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지.

아직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는 네 유해를 한 줌 꺼내 산소 주변에 뿌리면서 나는 두 가지를 빌었단다. 이제 아무 고통 없는 곳에 편안히 쉬거라, 그리고 할아버지를 잘 지켜 드려라. 그리고는 난 아버님 무덤 앞에 돌덩이처럼 무너져 버리고 말았지.

이제 너는 원래 태어났던 곳, 우리 모두의 영원한 고향인 흙으로, 바람으로 돌아가고 말았구나. 머잖아 나도, 또 우리 주변의 모두도 네 뒤를 따라 가겠지만, 육신이 그렇게 간다고 해서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겠지. 분명 네 영혼이 남아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 믿고 싶구나. 그리고 틀림없이 우리는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거라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다하지 못한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아쉬운 인연을 이어갈 길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구나.

네가 떠난 뒤 벌초과 추석 때, 또 그 밖의 일로 선산을 몇 번인가 찾았지. 네가 잠든 그 땅을 딛고 서서 혹 솔잎 사이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이 네가 아닌가,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 몇 조각이 네가 아닌가, 몸을 숨기고 무슨 소리인가 열심히 지껄이는 새가 바로 네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많이도 했단다. 내가 모르는 바람이나 물로 네가 돌아와 비록 내가 알아보지 못하더라도 어찌 너와 나의 사이가 끊어질 수 있겠느냐. 넌 언제나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난 너의 영원한 아비인 것을.

아들아, 네가 무엇이 되어 있든 언제나 편안하길 바란다. 그 가혹하고 끔찍했던 사고의 기억들은 이제 다 접어두고 저 구름처럼, 저 바람처럼 아무 속박도 없는 영원한 자유인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마. 편히 쉬거라, 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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