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체'의 전기를 읽으며

나도 꿈꾸는 리얼리스트가 되고 싶다

등록 2003.10.21 09:25수정 2003.10.21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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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사망 3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도 ‘체’의 열풍이 뜨겁게 분 적이 있다. 상당히 긴 기간동안 그의 전기는 전국의 거의 모든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호였다. 나도 그를 상당히 좋아했었다. 그래서 그의 전기가 하드카버에 아름다운 호화장정을 통해 서점에 나타났을 때, 나는 빨리 달려가서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만남의 유혹을 그를 다시 만나서 기쁨의 탄성을 지르며 그의 손을 잡고 싶었던 마음을 가라앉히게 된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일종의 고집 같은 것 때문이었다. 남들이 다들 그의 전기에 대해 열광하고 있을 때, 나만은 그의 사연을 자세히 듣고 싶은 유혹을 물리치고 싶었던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나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의 책이 정식으로 출판되기 이전에 그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대학시절. 그에 대한 이야기가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다니던 시절에 나는 그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이야기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에 대한 짝사랑의 시간이 얼마간 지난 뒤, 나는 어렵사리 그의 전기의 간단한 요약본이 담긴 조그만 소책자를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이야기로 듣는 것과 비록 소책자이지만, 책으로 읽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이었다. 그는 내 삶에 큰 획을 그은 소중한 인물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가 돌아온 것이다. 입에서 입으로 옮겨 다니던 비밀스러움을 벗어버리고, 당당한 개선장군처럼 모든 서점들을 단숨에 점령하며 나타난 것이다. 나는 화려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를 만나기가 싫었다. 내 속에는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연모의 마음이 불타오르고 있는데, 열린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의 틈에 섞여서 그를 만나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제 그는 다른 나라들에서 그렇듯이 우리나라에서도 만인의 우상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만나기가 싫었던 것이다. 내 속에 오랫동안 품고 있던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만인의 연인이 아니라, 나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이제 그의 책이 나온 지 6년이 되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에 대한 열풍도 또 다른 바람에 묻혀서 많이 잊혀져 갔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뒤늦게 그의 책을 읽는다. 첫 장의 그의 사진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히. 그래, 그의 삶은 이런 괘적을 밟아갔구나.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예전보다 훨씬 그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랑에는 꼭 많은 지식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단지 그의 희미한 웃음을 먼발치에서만 보아도 평생을 가슴을 태우며 살 수도 있는 것이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는 무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 나는 이제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 아르헨티나의 의대를 갓 졸업한 천식환자가 엉뚱한 쿠바에서 게릴라전을 이끌었으며, 한 나라의 경제를 책임지던 그가 왜 엉뚱하게 아프리카에서 총을 들고 싸웠고, 마침내 볼리비아의 한 이름모를 산골에서 죽어갔는지를. 그리고 그의 삶을 그렇게 이끌어갔던 그의 내면에 든 열정은 어떤 것이었는지를.

혁명보다 더 어려운 것이 개혁이다.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에서의 게릴라전은 끔찍한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성하지 않은 몸을 이끌고 그는 힘든 싸움을 치루었고 마침내 이겨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게릴라전의 정당성에 대한 전파를 게을리 하지 않는 교사였고, 쿠바혁명의 정신적인 지주였다. 그는 또한 싸움터에서도 괴테를 손에서 놓지 않은 독서가였다.

그의 전기는 그를 크게 부각시키고 있지만, 행간에서 나는 카스트로의 지도력과 주도면밀함을 읽을 수 있었다. 현실주의자 카스트로와 로맨티스트 게바라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서 꿈을 버리지 말자"

체는 그 꿈을 쫒아서 이국의 땅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나라에 그의 열정의 씨앗을 뿌려놓았다. 이루어질 수 없을 지도 모르는 꿈을 이루려는 로맨티스트들이 현실세계에서의 변화를 이루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도록 만든 것이다. 그의 삶과 쿠바의 변화에 깊은 영향을 받은 중미의 게릴라전은 무려 수십 년간이나 이어졌었다.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그래서 체 게바라의 전기가 버젓이 서점에 전시되고, 각광을 받으며 팔리고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슴 속에, 그가 가슴에 담고 있던 그런 간절함을 간직하고 있을까. 그의 눈빛에 어리는 그 뜨거운 불길 같은 정열을 마음에 품고서, 냉철한 마음으로 한걸음씩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체 게바라 평전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실천문학사,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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