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매일 백무현
석고대죄(席藁待罪). 국어사전을 보면 "거적을 깔고 앉아 벌을 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이라고 되어있다. 죄과에 대한 처벌을 기다린다는 설명도 덧붙여져 있다.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이 석고대죄를 한다고 밝혔다. 최 대표는 한나라당의 SK 비자금 수수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석고대죄하는 심정으로 사죄를 드린다"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그가 말한 석고대죄에는 '벌을 주기를 기다린다'는 뜻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최 대표는 자신이 받아야 하는 벌을 기다리기 보다는, 다른 사람, 그러니까 노무현 대통령에게 벌을 줄 방법을 찾아내는데 관심이 온통 쏠려있는 모습이었다. 그가 석고대죄의 말 뜻을 잘못 알았든지, 아니면 거짓으로 석고대죄를 했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최 대표가 말로만 석고대죄를 하고 있음은 도처에서 드러난다. 잘못했다고 말은 하면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않고 있다. 마치 어른이 호통을 치며 야단치니까 일단 무서워서 잘못했다고 빌어놓고는, 막상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말못하고 있는 아이의 모습같다고나 할까.
100억원을 준 쪽은 있지만 100억원을 달라고 한 사람은 누구인지, 그리고 어디에 썼는지에 대해 한나라당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진상을 덮으면서 석고대죄하고 있다니…. 세상에 그런 석고대죄가 어디있는가.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최 대표가 선언한 특검제 추진이다. 한나라당이 제출하겠다는 법안이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보도를 통해 전해지는 내용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가 없다.
한나라당에서는 SK비자금 행방 뿐만 아니라 현대 비자금 750억원의 사용처,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의 비리 의혹, 이상수 전 민주당 사무총장의 대선자금 모금 내역, 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의 굿모닝시티 자금수수 의혹 및 대선자금 모금 의혹 등 노 대통령 취임 후 논란이 된 대부분의 사건을 수사대상에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게 아예 검찰을 따로 만드는 것이지 어디 특검인가. 이 모든 의혹들을 다 수사하자면 특검 수사 기간만도 1년은 걸릴 것 같다. 아무리 정치판에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논법이 횡행한다고 하지만, 이런 식의 특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지 반문하게 된다.
그리고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내용도 조잡한 졸속법안이라는 비판을 초래하면서까지 이렇게 서둘러야 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특검을 추진하더라도 다른 당들의 입장도 확인하고 협상도 하며 진행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제까지 다 그렇게 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와대 회동이 끝나자마자 다른 당과의 협의고 뭐고, 쫓기듯이 법안을 마련하여 곧바로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한다. 다른 당의 입장은 들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벌써 단독처리 불사 얘기까지 나온다. 특검을 할 때 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허둥대며 몰아붙여야 하는 속사정은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에 쫓기고 있는 것일까.
다름아닌 검찰수사에 쫓기고 있는 모습이다. 이번 주 들어 검찰수사가 정점을 향해 가고 있고, 지난해 대선 지도부에 대한 소환조사가 임박해가니까 그것을 의식해서 이렇게 서두른다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그래서 '방탄특검'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다. "지금의 검찰수사는 불공평하니까 우리는 검찰수사를 거부하고 특검수사를 받겠다. 거기서 모든 진실을 다 밝히겠다." 이런 식의 상황이 전개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벌써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도 한 두 번 당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미 그 수를 다 읽고 있는 분위기이다. 평소 한나라당에 우호적이었던 일부 신문들조차도 먼저 검찰조사에 협조하여 100억 수수의 진상을 밝히는 것이 순서라는 지적을 하고 있다.
최병렬 대표는 특검카드를 내놓아 일단 검찰수사를 막고 특검정국으로 전환시켜 나가겠다는 회심의 승부수를 던졌지만, 막상 여론은 뜻대로 가주지않는 듯하다.
잘못하면 무리한 특검카드는 한나라당의 자충수가 될 지도 모른다. 특검이 예고되는 상황이라면, 검찰수사는 나중에 혹여라도 '부실수사'라는 소리를 안듣기 위해서도 더욱 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병렬 대표가 석고대죄라는 말을 입에 담으려면 최소한 한가지는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 드러난 100억원 수수의 진상을 국민 앞에 다 밝혀야 한다. 눈앞에 사실로 드러난 엄청난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으면서, 특검수사를 통해 여야 모두의 의혹을 다 밝히자는 거창한 요구만 들고 나오니, 진실성에 무게가 실리지 않는 것이다. 국민들을 이해시키려면 먼저 100억원 수수에 대한 검찰수사에 적극 협조하고 법적·정치적으로 분명히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그래서 100억원의 진상이 다 밝혀지고 나면 그때 특검을 해도 늦지않다. 그때는 정말 여야의 대선자금 모두를 다 샅샅이 파헤치고, 지금의 정치권이 쑥밭이 되든말든 정치개혁의 전기를 마련하자. 현역 국회의원의 절반이 물러나야 되는 상황이 되더라도 그렇게 하자.
다만 그때에는 최 대표가 겨냥한 노 대통령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회창 전총재도 훨씬 더 큰 어려움에 몰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최 대표가 말한 '무제한 특검'이고, 그때 한나라당의 앞길에도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지금은 100억원의 진상을 먼저 밝혀내야 할 때이다. 혹여라도 특검추진을 구실삼아 100억원에 대한 검찰수사에는 응할 수 없다는 억지를 부리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남의 죄'를 벌하겠다는 의도가 깔려있는 특검 얘기는, '자신의 죄'를 국민 앞에 모두 털어놓은 다음에 하는 것이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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