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질없는 것들을 사랑했던 날들을 향해 부르는 비가(悲歌)

<시 더듬더듬 읽기 ⑨> 황지우 시인의 <뼈아픈 후회>

등록 2003.10.31 08:46수정 2003.10.3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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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신상)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황지우 詩 <뼈 아픈 후회> 전문



흐린 가을날의 오후 후회라는 감정처럼 아주 느린 걸음으로 햇살이 닿는 창가에 앉아 황지우의 詩 <뼈 아픈 후회>를 읽는다.

슬프다, 라고 낮은 목소리로 첫줄을 중얼거리면 내 지난 시간들이 낮은 포복의 자세로 가슴 속으로 기어든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 마다 모두 폐허다."

맞아,그 격렬함에도 모든 게 온전히 남아 있다면 그게 어디 제대로 된 사랑이라 할 수 없겠지, 암… 시인이 사랑했던 자리가 어떤 자리였는진 잘 모르지만 그와 나의 감정은 어느 지점에선가 기묘한 일체감을 맛본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모두 폐허다>라는 시인의 진술을 그대로 다 믿지는 않는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슬픔으로 치환해내는 것이 바로 시간의 권능이며 어떤 참혹함도 '아름다웠다'라고 윤색해버리는 기억의 불완전성을 알고 있으므로, 자신이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라는 시인의 탄식을 액면 그대로 전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완전히 망가지면서/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건지"라고 시인은 깊은 허탈감에 젖어 누군가에게 묻고 어느 새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열정은 모든 걸 파괴해버린다. 파괴함으로써 비로소 포만감을 느낀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의 열정이 가져다주는 잔인함이 아니던가.

서로를 산산히 부수고 나면 이윽고 사랑의 종말이 온다. 시인은 그 폐허 위에 "사막신전"을 건설한다. 그리고 그 신전은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여전히 그의 사랑의 자리는 폐허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ego라는 지독한 자기애는 밖으로 열린 모든 관계를 끊어버린다. 그러므로 ego란 감정이 들끓고 있던 그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부재(不在)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뒤미쳐 시인은 "젊은 시절, 내가 自請한 고난도/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라고 자책한다.

이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 몇 마디 말을 떨구기 위해 여지껏 그 많은 넋두리를 쏟아 놓은 것이다. 결국 젊은 날의 자신이 이타심이라고 믿었던 것이 이기심 혹은 자기애(自己愛)에 다름 아니었다는 쓰라린 고백을 쏟아놓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것이 결국은 自己愛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사랑의 부재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정이란 얼마나 사기성이 농후한 것인가. 때로는 자기자신 마저도 철저히 속아버릴 정도이니까.

어쩌면 시인이 슬픈 것은 자신이 사랑했던 자리마다 폐허가 되어버린 사실 보다는 사랑 혹은 헌신이라고 믿었던 감정에 농락당한 것이 아니었을까.

의미는 다르지만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詩에서 요절한 시인 기형도가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고 말한 것과는 또 다른 도도한 자기부정의 심리가 이 詩의 전편을 휘덮고 있다. 한 마디로 이 詩는 반은 독백, 반은 울음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렇게 그 울음이 끓어 넘쳐 내게로 서서히 흘러온다.

산사나무
산사나무안병기
어제 오후 산사나무 붉은 열매가 사무치게 아름다운 길을 걸어 집에 왔다. 슬프다. 시인의 탄식처럼 내 지나온 자리도 그렇게 온통 폐허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혹시 아는가. 저 산사나무도 폐허를 견뎌내 저렇게 아름다운 열매를 달게 되었는지를… 여태 폐허를 터덕터덕 걸어온 사내에게 산사나무 한 그루가 가만히 눈빛으로 위안의 말 몇 마디를 던진다. 불행이 예기치 않게 오듯 위안도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것이 생이 지닌 비의(秘意)가 아닐까.

햇살이 무겁게 눈꺼풀 위에 내려 앉는다.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러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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