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현직기자의 참회 "기자는 노동의 적인가"

이상호 MBC 기자 과거 '선무방송' 자성... "기자 불성실도 죄악"

등록 2003.11.07 02:44수정 2003.11.07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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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실은 죄악일 수도 있다."

a 이상호 MBC 기자.

이상호 MBC 기자.

노동자들의 잇단 분신과 자살 뒤에 악의적인 언론보도의 책임도 크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현직 기자가 스스로 참회하는 글을 실었다.

이상호 MBC 기자는 지난 3일 홈페이지 '이상호의 고발뉴스'(www.leesangho.com)에 쓴 '기자는 노동의 적인가'를 통해 그동안 기자로서 노동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되돌아봤다. 이 기자는 현재 MBC <미디어비평>을 담당하고 있다.

그는 검찰의 '선무방송' 수준이었던 자신이 노동문제를 뼈저리게 각성하게 된 경험을 공개했다. '노동 적대적 언론환경의 현실과 과제'(3일) 토론회에 참석했던 그는 "언론의 노동보도가 '고립→분열→섬멸'이라는 전통적인 태도를 벗지 못하고 있다는 발제문을 보는 순간 충격과 함께 자괴감이 밀려왔다"고 토로했다.

이어 "언론이 노동문제에 이같이 적대적이라면, 나 역시 노동의 적이란 말인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아래에서도 노동문제는 철저히 경제의 종속변수로서 언론의 주요 먹이감이 됐다는 수많은 보도 사례를 접하면서 최소한의 심리적 저항감도 가질 수 없었다, 지적이 옳았기 때문이었다"라고 털어놨다.

"그렇다면, 나는 기자로서 지금껏 노동문제를 어떻게 다뤄왔던가"라고 거듭 자문한 그는 90년대 말 대검찰청 출입기자 시절의 부끄러운 기억을 소개했다. 노동운동에 대응하는 최고 공권력 운용부서인 대검찰청 공안부의 검사장, 부장검사들과 어울렸던 사례이다.

그는 "매주 월요일이면 보신탕을 얻어먹고, 이들과의 대화를 거치며 서서히 노사문제는 내 일이 아닌 창 밖의 일쯤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그는 "노동자들의 '장기파업'에 따른 대외신인도 저하를 우려하며, 노조의 '극렬파업'에 대해 책임자를 엄단하겠다는 검찰의 엄포성 입장을 떠벌리는 선무방송을 했다"고 표현했다.

이후 그는 일용 노동시장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시혜 차원의 일회성 관심에 불과했다고 스스로를 지적했다. 그러던 그는 올해 초 <시사매거진 2580>에서 두산중공업 배달호씨 분신을 취재하면서 노동문제를 뼈저리게 각성하게 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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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에 직접 내려가 불꽃 속에서 죽어간 배씨의 고뇌 및 체취를 뒤밟고, '헌신적인' 부인을 만나고, 그가 살았던 집을 돌아보며 자신의 불성실과 태만을 반성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는 이때 노동문제에 있어 '불성실은 죄악'일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 노동에 대한 자신의 관심 자체가 얼마나 관념에 그쳤는가를 인식했다고 덧붙였다.

잔액 0원짜리 통장이 나뒹굴던 책상, 어른이 누우면 머리와 다리가 양쪽 벽에 닿을 정도의 작은 방. 두산중공업은 그런 배씨의 집마저 압류했기 때문이다. 그는 손배소와 가압류 등 자본의 무자비한 '살육'이 노동자들에게 회복 불가능한 깊은 상처를 안기고 있는 현실을 목격한 것이다.


그는 "언론이 침묵한 사이 노동자들은 소리없이 죽어가고 있었다. 노동현실을 모르거나 또 알고도 쓰지 않는다면 그 자체로 노동의 적이고, 노동자의 살인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자질'로 표현한 기자 역할을 놓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애정 등 거창한 의미를 대지 않더라도 그대로의 최소한 사실관계는 보도하는 것"이라고 스스로 답했다. 결국 그는 "그동안 나의 보도는 공정하지 못했고, 그들이 '적'이라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다"고 고백했다.

이같은 성찰 속에 그는 나름대로 노동보도 개선을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특히 자본과 권력의 이해를 대변하는 매체의 실체를 밝히고 그에 따른 평가를 받도록 언론환경을 투명하게 바꾸는 노력부터 강조했다.

'사후약방문'도 쓰지 못하는 보도관행과 함께 출입처 위주의 취재시스템 개선도 꼽았다. 노동에 덧씌운 '불온한' 색채를 씻어내고 기자들 스스로 노동자임을 자각하는 한편 우리 노동운동사에 대한 재인식 역시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언론의 노동보도는 보도 자체의 비중 만큼이나 언론개혁이나 현대사 바로보기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서 "나부터 노동의 적에서 친구로 거듭날 때, 우리 언론도 조그마한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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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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