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련은 과연 피해자인가

[최재천 칼럼] 반성 없는 정치자금 대안제시는 무의미

등록 2003.11.07 09:51수정 2003.11.0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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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지난 9월 16일 오후 전경련 회장단이 신라호텔에서 피해복구 대책 회의를 갖기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 9월 16일 오후 전경련 회장단이 신라호텔에서 피해복구 대책 회의를 갖기 앞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1. 전경련은 대선자금의 공범인가, 피해자인가

현명관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기자 간담회에서 "정치자금 관련 위법행위는 정치권이 고해성사를 거쳐 국민 동의를 밟는 순서로 사면하는 한편, 정치자금 관련 기업회계 처리에 대해서도 일괄사면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권은 고해성사와 사면, 기업은 그저 사면'을 해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해법에 반대한다. 전경련, 좀 더 본질적으로는 재벌들의 사과와 반성과 책임인식이 없기에 그렇다.

SK비자금에서 촉발된 대선자금 수사에 대해 전경련의 대체적인 시각은 '정치 때문에 경제가 발목 잡히는 일'이거나, '기업들이 본연의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제발 내버려뒀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읽혀진다.

검찰 수사는 기업의 투명성 부족으로 비쳐 대외신인도 하락이 불가피하고, 주요 임원의 소환은 기업의 정책결정지연과 사기저하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노동계의 노사분규가 심해질 것이라고 걱정한다. 경총 관계자도 "정치권의 요구로 돈은 돈대로 내고 수사까지 받게 되는데 대해 억울하다는 불만이 재계에 팽배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치자금에 대한 전경련이나 경총 등 재계의 입장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정치자금은 정치권의 요구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주었고, 최소한의 보험금일 뿐이며, 재계는 결코 공범이 아닌 정치자금 수사의 최대 피해자일 뿐이다.'


하지만 '말짱' 거짓말이다. 이번 사건은 정치권과 재벌의 '공모'에 의한 공동정범이다.

2. 일당 민주주의라는 일본식 모델을 꿈꾼 재계


"재벌들의 이상은 안정된 일당 민주주의라는 일본식 모델이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현대사>)

미국에는 군산복합체가 있다. 일본에는 자민당·경단련 복합체가 있다. 한국에는 전경련이 대표하는 재벌과 '조중동'이 상징하는 특정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이 대표하는 수구에 치우친 보수정당간의 복합체가 있다. 일본을 정경유착이라고 표현하자면, 한국은 '정경언(政經言)' 유착인 셈이다.

SK를 비롯한 재벌들이 특히 한나라당에게 준 정치자금의 성격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민당 중심의 일당 민주주의라는 일본식 모델, 즉 한나라당 중심의 일당 민주주의라는 한국적 민주주의의 모델이 꿈이었다. 100억원은 단순한 보험금이 아닌 이런 적극적인 의미의 정치개입으로 해석된다. 특정 보수언론은 사설로, 재벌은 돈으로 자신들을 위한 정권창출에 나섰던 것이다.

"전경련이 태동한 배경에는 5.16 군사 쿠데타 세력이 있다. 1961년 쿠데타 세력들이 기업인들을 부정축재자로 몰 때 박정희 의장에게 찾아간 사람이 이병철 회장이었다. 그는 박 의장에게 경제재건 문제로 담판을 지었고, 재계와 대화창구 필요성을 느낀 박 의장 지시에 따라 만든 단체가 바로 전경련이다.(<일요시사> 177호)"

이들은 정통성 측면에서 결정적 결함을 가지고 있는 쿠데타 세력과 손을 잡고, 정경유착의 길을 열었다. 이러한 정경유착은 개발독재시대의 쌍두마차였다. 재벌기업들은 특혜, 독점, 투기를 통해 성장을 거듭했다. 그러던 사이에 어느덧 재벌의 위상은 군부, 관료들과 대등해질 수 있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편 재벌들은 새로운 장군들이 나타나서 자기네 재산을 빼앗거나 무슨무슨 산업에 투자하라고 일일이 지시하는 데 싫증이 나서, 중산층과 같은 방향으로, 즉 민주적 선거와 법치 쪽으로 분명히 이동했다.(브루스 커밍스, 위의 책)"

그리고는 대안으로 일본식 일당지배 민주주의를 꿈꾸었던 것이다. 재벌의 힘은 어느 순간 이건희 회장의 "정치권은 3류"라는 발언으로 이어졌다. 경제권력이 정치권력에 예속돼 있던 상황은 어느 순간 대등 혹은 경제권력의 배후 조종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정치자금의 패러다임도 변해갔다. '특혜의 대가'에서 '보험'으로, '보험'에서 '적극적인 투자'로,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정치자금이다.

손길승 전경련 회장은 지난 2002년 2월, SK회장 시절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주최한 금요조찬 대화에서 "부당한 정치자금은 못 내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정당한 정치자금은 내겠다'는 적극적 의미로 해석하는 언론도 있었다.

손 회장은 "자유민주주의 창달에 관한 정치적 비전을 가진 분이라면 재계가 공동으로 정당하게 정치자금을 지원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SK가 민주당에게 주었다는 25억과 한나라당에게 주었다는 100억원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3. 재벌은 과연 시장경제를 바라고 있는가

전경련이 1999년 발표한 기업윤리헌장은 "우리기업은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창달하며"를 선언하고, 제4항은 "우리기업은 정치권 및 정부와 건전하고 투명한 관계를 유지한다. … 정치권 및 행정부와 투명한 관계 유지를 통해 바람직한 정경문화정착을 위해 노력한다"고 정한다.

2003년 10월 6일 현명관 부회장은 "재계가 정치자금을 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헌법이 지향하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칙을 지켜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것도 믿을 수 없다.

지난 2003년 1월 10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김석중 전경련 상무의 말을 인용하여 '인수위의 목표는 사회주의'라고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신문은 “우리들은 탈규제와 경제자유를 원한다. 그러나 인수위원회는 경제정책에 있어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 그들은 경제체제의 급격한 변화를 원한다. 그들의 목표는 사회주의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전경련은 공식입장과는 다르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전경련 특히 재벌이 사회주의를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이들이 꿈꾸는 것은 결코 자유시장경제질서가 아닌 것 같다. 도리어 새로운 형태의 국가자본주의를 꿈꾸는 것 같다. 국가자본주의는 국가가 대자본과 결합하여 권력으로 국민의 경제생활에 강력한 간섭과 통제를 행하는 제도이다.

재벌의 독점 자본력과 국가권력의 결합, 처음에는 재벌이 복종하는 단계지만, 대등단계를 거쳐 궁극적으로 돈줄을 쥐고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하다보면 어느새 재벌과 국가의 경계는 없어지고 국가자본주의로 가게 되는 것 아닌가.

자유기업센터나 한국경제연구원 등 전경련의 싱크탱크들은 끊임없이 헌법상 경제질서 조항의 폐지를 주장한다. 이들은 헌법 조항 중 경제 집중력 억제, 재산권 행사, 사적 자유계약을 언급한 관련 조항이 기업 활동에 장애가 된다면서 개정을 주장한다.

하지만 비자금 조성과 분식회계가 여전히 살아있어 기업회계의 투명성이 부족한 나라, 주주의 권리를 우습게 아는 나라, 소수의 지분으로 지배권을 행사하는 재벌총수일가의 전횡이 계속되고 상속·증여세의 회피를 통해 재산과 사실상 신분의 세습의 계속되고 있는 신분제 사회의 나라, 이렇게 조성한 불법 비자금으로 적극적인 정경유착에 가담하여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아니라, '재벌들이 살기 좋은 나라'를 꿈꾸고 있는 한 헌법상 경제질서 조항을 없애서는 안될 것이다.

불법 정치자금은 불법 비자금에서 나오고, 불법 비자금은 분식회계 등 불법 회계 처리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최근의 주주자본주의 원칙을 저버리는 일이다. 당연히 시장질서와 사회적 가치의 배분은 왜곡된다. 재벌의 정치자금 밀거래는 결코 시장경제 질서와 친할 수 없다.

4. 재벌들이 꿈꾸는 정치자금

현 부회장은 대안으로 지난 97년 폐지됐던 지정기탁금제도를 부활해 기업이 선호하는 정책방향을 가진 정당이나 정치인에게 정치자금을 지정해 제공하는 방법을 허용할 것을 주장했다. 지난 해 손길승 회장이 발언했던 것과 마찬가지 맥락이다. 지하주차장에서 이루어졌던 수수관행을 공개리에 하겠다는 의지로도 읽혀진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런 주장은 정경유착의 원조인 일본과 유사한 상황이다. 일본 기업들의 정치 헌금 곧 지나친 정경유착은 지난 93년까지 지속됐다. 자민당 일당지배가 가능했던 건 튼튼한 돈줄 내지는 자민당과 경단련의 이해관계가 일치됐기 때문이다. 1993년 자민당은 각종 스캔들로 인해 마침내 야당으로 전락한다.

이때까지 재계는 자민당에게만 매년 100억엔 이상의 정치자금을 제공해 왔다. 그러다가 자민당이 실각하고 정치자금관련 스캔들이 계속되자 기업의 직접적인 정치헌금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됐다. 정당 산하의 정치자금 단체를 통해서만 기부가 허용되고, 그것도 제한된 금액 한도 내에서였다. 그런데 최근 일본 경단련은 2004년부터 정치헌금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다.

경단련이 밝힌 정치 헌금 기준은 ① 여야의 정책을 평가해 그 결과를 회원 기업들에게 알린다 ② 회원들은 평가결과를 기준으로 헌금액을 결정한다 ③ 헌금액의 가이드라인은 공개하지 않는다 등이다.

우리 전경련의 기준도 이것과는 별반 다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일본의 정치자금 관행을 그대로 답습할까 두렵다.

물론 다른 나라도 기업의 정치헌금은 존재한다. 하지만 자금형성과정이 투명하고 수수과정이 철저히 공개적이며, 수표사용이 의무화되어 있고, 액수도 극히 제한적이며 기부자의 인적사항은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정도라면 우리도 전경련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보수정당의 일당지배를 꿈꾸던 은밀한 의도를 이제 노골적으로 표명한 차원이라면 반대할 수밖에 없다.

반성과 철저한 자기고백과 수사협조가 전제되지 않은 대안 제시는 무의미하다. 모든 것을 늘 노동조합과 인건비 탓으로만 돌리던 태도가 대선자금 사건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된다면 전경련의 희망은 없다. 전경련이 진정 자유시장경제질서를 지향한다면 스스로의 행동부터 시장경제질서에 어긋남을 없는지 되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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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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