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버는 재미, 그것 좀 느끼게 해 줘!"

69세 실버 택배원 김보환씨의 하루...돈보다 일 자체가 즐겁다

등록 2003.11.12 10:22수정 2003.11.1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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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학로에 위치한 시니어클럽에서 만난 김보환(69) 할아버지

대학로에 위치한 시니어클럽에서 만난 김보환(69) 할아버지 ⓒ 김진석

지난달 말 열린 '실버 취업박람회'에는 약 3만1000여 명의 노인들이 몰려 청년 실업 못지 않은 노인 실업 문제의 경각심을 환기시켰다. 362개 업체가 참여해 총 3968명을 고용할 계획이었던 실버 취업 박람회의 경쟁률은 대략 10대 1정도. 원서를 두 손에 꼭 쥔 노인들의 진지함은 여느 취업 박람회에 몰린 청년들의 절박함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실버 취업박람회'는 곧 65세 이상 노인들의 성토장이 되고 말았다. 택배, 주유소, 간단한 청소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업체가 평균 62세 이하의 노인들을 채용하려 했다. 이에 65세 이상 노인들은 '실버 없는 실버 취업 박람회'라며 아쉬움을 표했고, 기자에게 "기자 양반 미래의 모습이니, 제발 일자리 좀 만들어 달라"고 당부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는 2026년에는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전체의 20%를 넘을 전망이다. 이에 정부는 정년을 65세로 늘이고, 정년을 보장하되 임금을 깎는 '임금피크제' 도입 등 실버 세대 취업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실버 취업 박람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정부 또한 65세 이상을 위한 실질적인 취업 정책이 요원한 실정이다.

시니어 클럽은 어떤 곳?

지역사회 시니어클럽(Senior Club)은 65세 이상의 노인과 50세 이상의 퇴직자에게 창업거리나 일자리를 제공하고, 봉사활동을 소개하자는 취지로 2001년 7월 시작됐다.

이들은 보건복지부나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후원을 받아 민간 기관이 위탁 운영하며 현재 종로·대구·부천·충주·등 전국 20개가 개관한 상태이다.

성공회 유지 재단 종로 시니어클럽은 보건복지부 시범 사업 1호로 출발한 '노인자활센터'이다. 시니어 클럽은 일자리 마련과 사회적 참여, 복지 서비스 등 어르신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종합적 차원의 접근을 모색중이다.

현재 이 곳에서 시도되고 있는 사업은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서 제공하는 창업사업, 사회복지 차원에서의 복지사업, 사회적 참여를 위한 문화사업, 그리고 사회교육사업 등이 있다.

또 간병인, 베이비시터, 택배사업 등이 동시에 추진 중이며 약 350여 명의 어르신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또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건강 검진 서비스와 어르신 문화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 / 김은성
이런 와중에 '실버택배'라는 틈새 직종이 생겨 일거리 없는 65세 이상 노인들에게 위안이 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종로에 위치한 노인자활센터 '시니어 클럽'에서 일하는 실버 택배원 김보환(69)씨를 만나 하루 일과를 함께 했다.

부천이 자택인 김씨는 아침 9시 30분까지 시니어클럽으로 출근해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이곳에서는 택배 업무를 13명의 노인들이 순서를 정해 차례로 배달을 맡는다. 간혹 운이 좋으면 하루 세 건 정도 배달 할 수 있다.

시니어 클럽에서 집계한 어르신들의 한달 평균 수입은 35-37만원 정도. 한 달에 적게는 20만원부터 많게는 57만원까지 벌 수 있다. 무료인 지하철비 외에 드는 비용은 버스나 택시 등의 기타 차비와 점심 값 정도이다. 그리고 수입의 10%를 어르신을 위한 자활 모금에 기부한다. 화려했던 젊은 시절에 비해 그리 큰돈은 아니어도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한 달 용돈으로 쓰기엔 적잖은 수입이 된다.

김보환씨 또한 그리 큰 수입은 없어도 '만보기' 로 걸음 수를 확인하며 건강을 관리하고 용돈을 벌기 위해 택배 일을 하고 있다.

"집에 있어 봐야 마누라랑 얼굴 보며 싸우기밖에 더해? 안 그래도 퇴직 후 마누라가 얼마나 날 괄시하는데…(웃음). 아마 나뿐 아니라 우리 또래는 다 그럴 거야. 자식들이 준 용돈보다는 내가 벌어서 쓴 돈이 더 편해. 탑골 공원에서 하루 종일 놀다가 공짜로 밥만 먹고 집에 들어가는 것 보다는 낫지 않아?"

a 자신의 순번이 되자 가방을 메고 서둘러 나가는 김 할어버지.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자신이 아직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자신의 순번이 되자 가방을 메고 서둘러 나가는 김 할어버지.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자신이 아직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 때문인지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 김진석

크게 확대된 서울 지하철 노선도가 벽 한복판에 붙여 있는 택배 대기실. 순서를 기다리며 모인 어르신들이 뉴스나 신문 등을 보며 저마다 사회 돌아가는 상황을 얘기한다.


"그나마 날씨가 안 추워 서민들 살기엔 다행"이라는 말부터 시작해 "행사를 위한 행사였지"라는 실버취업 박람회의 아쉬움까지 얘기꽃이 피는 사이 김씨의 배달 차례가 돌아왔다.

배달하는 물건은 다양하다. 열쇠나 도장, 서류 등의 가벼운 물건이 있는가 하면 화분, 옷, 커튼 등 적잖은 체력을 필요로 하는 물건도 있다. 그 중 가장 어려운 건 '꽃다발' 이다. 발 디딜 틈 없는 지하철 속에서 행여 작은 상처라도 날까 조심스레 보듬고 가야하기에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비가 오는 날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한 등산화는 필수. 똑같은 양을 걸어도 등산화를 신고 걷는 게 발에 부담이 덜하기에 1초라도 시간을 단축시켜 정해진 시간 내에 배달을 더 하기 위해 대부분 택배원들은 등산화를 애용한다.

김씨의 첫 임무는 안암동 고대병원까지 서류를 배달하는 일이었다. 수시로 영수증을 써야 하기에 돋보기와 함께 불이 들어오는 볼펜을 준비해야 한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려 거리는 온통 떨어진 은행잎 천지였고 이에 김씨는 미끄러운 듯 조심스레 잰걸음을 재촉했다.

김씨에겐 비오는 날이 가장 일하기 번거로운 날이자 동시에 가장 운이 좋은 날이다. 비가 오면 오토바이 택배와 다른 택배원들이 쉴 확률이 많아 상대적으로 더 많은 배달 건수가 배당되기 때문이다. 바쁠 때는 바짓가랑이가 물에 다 젖는 것도 모른 채 급히 걸음을 재촉한다.

a 지하철 무임 승차권을 받는 김 할아버지.

지하철 무임 승차권을 받는 김 할아버지. ⓒ 김진석

택배 대기실 벽에 붙어 있는 지하철 노선도가 김씨의 머리 속으로 옮겨왔나 보다. 지하철을 편리하게 타는 요령부터 시작해 내리고 타야 할 승강장 번호까지 줄줄 외워댄다. 그간 얼마나 여러 번 길을 잃고 헤맸는지 모른다. 솔직히 김씨는 지금도 지하철이 무료만 아니라면 잠깐 긴장을 늦춘 사이 헤매기 십상인 지하철보다 버스를 이용하고 싶다고 토로한다.

그러나 올해 4월부터 택배 일을 시작하면서 계속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던 김씨가 무료인 지하철을 포기하고 자비가 드는 버스를 이용할리 만무하다.

오늘 가는 고대 병원도 김씨에겐 초행길이다. 길을 가는 이를 붙잡고 묻고 또 묻고 계속 확인하기를 여러 번. 어느 덧 한 건의 배달을 마치고 나니 시간은 벌써 점심 때를 훌쩍 넘어섰다. 그래도 오늘은 길 가던 이들이 잘 알려주고 또 배달할 곳의 위치가 정확히 적혀 있어 비교적 찾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어떤 때는 전화번호만 달랑 적힌 주소를 가지고 무작정 찾아가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또 예전엔 유독 운이 안 좋은 날이었는지 김씨가 길을 문의했던 20명의 사람들이 모두 초행길이라며 번번이 거절했던 적도 있었다고.

점심 후 김씨는 또 언제 부를지 모르는 호출을 마냥 기다려야 한다. 이미 65세를 훌쩍 넘어 버린 그는 건강하게 놀지 않고 택배일이라도 할 수 있음에 감사해 했다. 김씨는 "65세가 넘은 노인이 과연 한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반문했다. 이어 "노년 세대의 중요성에 대해서 내가 무슨 말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고 변화하는 게 있겠느냐" 고 냉소섞인 말을 내뱉었다.

a "허허 도장 배달이지". 무엇을 배달하느냐는 질문에 도장을 내보이며 웃는다

"허허 도장 배달이지". 무엇을 배달하느냐는 질문에 도장을 내보이며 웃는다 ⓒ 김진석

"현재 사회에서 우리가 필요하긴 하나? 지금으로선 우리 역할이 없어졌지. 나이가 든다는 건 빨리 죽으라는 거 아닌가? 젊은이들도 저리 일을 못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가 무슨 일을 하겠나…."

택배는 버스 안내 요원으로 일하던 김씨가 61세에 정년 퇴임 후 8년만에 얻은 소중한 직업이다. 일찍 부모님이 돌아가신 김씨는 홀로 세상과 맞서느라 이것저것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김씨는 정신없이 사느라 생각이나 취미 같은 건 가질 틈조차 없었다고 한다. 간혹 주현미와 문희옥의 노래를 즐겨 듣는 것 외에 별다른 취미가 없는 그는 젊은 시절 기반을 잡느라 온 가족에게 고생시켰던 점이 그간의 삶 가운데 가장 후회되는 점이라 한다.

많이 못 갖고, 못 배운 터라 항상 소외된 삶을 힘겹게 살았노라고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그는 사느라 인연이 끊긴 친구들을 만나 보는 게 앞으로의 유일한 소망이다. 한참을 기다리던 중 부평까지 중요한 인감 도장을 배달하는 두 번째 임무가 배당됐다.

이번 건은 원거리인지라 배달료가 7000원이었던 안암동의 두 배를 뛰어넘어 1만5000원이다. 이에 김씨는 정말 운이 좋은 날이라며 미소가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점심값을 빼고 10%를 제외해도 쏠쏠한 수입이라며 연신 뿌듯해 한다.

"억울하다고 생각하면 못해. 큰 돈을 바라서도 안 돼. 그저 용돈이나 벌면 다행이지. 어디 세상일이 쉬운 게 있나? 간혹 큰 벌이를 바라며 퇴직 후 별 준비 없이 크게 장사나 사업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다가 퇴직금 다 날리고 안 되면 정말 안타까워."

산전수전 다 겪으며 69년를 사는 동안 김씨에게 세상은 녹록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한편 좋은 사람이 더 많은 곳이기도 했다. 그저 일만 하고 사느라 도무지 노는 법도 모르고 체면 따지는 겉치레도 할 줄 모른다는 김씨. 그는 "이 나이에 내가 벌어 당당히 내 돈 쓰는 재미를 아느냐?" 며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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