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위한 책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살아 가는 우리 가족 이야기

등록 2003.11.13 13:32수정 2003.11.14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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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아, 니네 아빠 책 나오니까 기분이 어떠냐?"
작은 아이는 늘 그렇듯이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몰라, 책이 왜?"
큰 아이 인효는 아빠 속셈을 꿰뚫어 한 방 먹였습니다.
"헤, 아빠 잘났다고 자랑하려고 그러지?"


이번에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참 일찍도 물어 본다. 책 나온 지가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데….”
"당신 기분이 어떠냐구?"
"당연히 뿌듯하지. 근데 갑자기 왜 그래? 그건 내가 물어 보고 싶은 말이었구만 당신은 책 나오니까 어떠신지?”
"기분이 찝찝해서 죽겠어. 일도 손에 안 잡히고. '거봐, 비우니까 채워지잖아'라는 책제목을 꼽씹어 보니께, 내가 꼭 채우고 싶어 안달난 놈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 책을 통해 뭔가를 채우려구 비우는 놈 같아서 기분이 영 그러네.”

"에이그, 걱정도 팔자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야, 만약에 책이 잘 팔려 돈을 많이 벌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내 책은 순전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자본의 노름판'에서 벗어나겠다고 주절대고 있으면서 오히려 책을 팔아 자본의 노름판에 끼어 들려고 하고 있는 것이잖아?"
"그건 순전히 자만심이 아닐까?"
"자만심? 자만심이라기보다는 개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지. 그냥 요즘 내 생각이 그래…."

a 한평 반짜리 작업실에서 빈둥빈둥거리고 있는 내게 아내가 "뭐해?" 그러길래 대답대신 사진 한방 찍었습니다.

한평 반짜리 작업실에서 빈둥빈둥거리고 있는 내게 아내가 "뭐해?" 그러길래 대답대신 사진 한방 찍었습니다. ⓒ 송성영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기 시작한 지 벌써 1 년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책 한 권이 나왔습니다. 그동안 써왔던 기사를 골라 책으로 묶었습니다.

사실 책이 나왔다는 기사를 올리기 전에 망설였습니다. '이 양반 은근히 책 선전하구 있네'하실 분들도 계실 것이니까요. 하지만 이번에 나온 책 내용은 이미 <오마이뉴스>에 죄다 실려 있으니 책 선전과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낯짝 두껍게 두 눈 딱 감고 기사를 올리기로 했습니다. 내가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큰 사건이기도 하고 또 제 글을 읽어 주시고 좋은 답글을 주신 분들께 자랑하고 싶었거든요.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한달 생활비 60만 원으로 살림을 꾸려오고 있는 아내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사는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자 가장 기뻐한 사람도 아내였습니다. 일중독에 걸려 있는 사람처럼 좀처럼 집안 일에 손을 놓지 못하는 아내였는데 요 며칠 내내 책에 푹 빠져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번에 나온 책은 거저 생긴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한동안 유일한 밥벌이었던 방송 원고 쓰는 일을 대책 없이 줄여 나가던 지난 겨울이었습니다. 우연히 <오마이뉴스>에 들어갔다가 아무나 기사를 올릴 수 있다기에 별 생각 없이 사는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적게 벌어 적게 먹고 살아 가는 우리 가족 이야기를 몇 꼭지 더 올렸는데 그게 뭔 자랑이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재미있게, 고맙게 읽었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신명이 났습니다. 내친김에 지난 6년 동안 시골에서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들을 주절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신나게 쓸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동안 밥벌이에 맞춰 글을 써 왔기에 쓰고 싶은 글을 신나게 써 본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요. 평소 잘 쓰지도 않는 미사여구를 끼워 넣을 필요도 없이, 머리통을 쥐어짜지 않고 그냥 마음 편하게 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하지만 막상 가격이 매겨진 책이 나오자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나름대로 자본의 논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그 어떤 정체성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습니다.

a 사랑채 개울가에 서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죄다 떨어졌습니다.

사랑채 개울가에 서 있는 은행나무의 노란 잎이 죄다 떨어졌습니다. ⓒ 송성영

겨울로 접어드는 가을비가 요 며칠 내내 심난하게 내렸습니다. 비가 그치면 서리가 내리고 금세 추워질 것 같았지만 별로였습니다. 아침저녁 공기가 그리 서늘하지 않아 봄비 같기도 했습니다.

사랑채 옆 개울가에 서 있는 노란 은행나무잎이 다 떨어졌는데 길가에는 봄에나 볼 수 있는 쑥이며 냉이가 난데없이 불쑥불쑥 올라와 있고 애기똥풀이 꽃을 피웠습니다. 더러 산기슭 양지바른 곳에는 망초꽃도 보였습니다. 집 뒤 대나무 숲에서는 겨울나기 보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물까치와 까치들이 서로 공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심난했습니다. 제대로 되어 있는 게 하나도 없어 보였습니다. 모든 게 고통스러워 보였습니다. 책이 나오면 홈페이지도 만들 작정이었고 또 여기저기 책을 보내고 또 출판기념회도 가질 예정이었습니다. 또 밥벌이도 해야 하고 할 일이 태산 같은데 손에 잡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런저런 전화가 걸려 오면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습니다. 비 오는 내내 빈둥빈둥 구들장 신세만 지고 있었습니다. 서리 올 것을 대비해 겨우 김장배추를 묶어 준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제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늘 그랬듯이 기분 좋게 떠들어대는 아이들조차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만사가 짜증이 났습니다.

"저리 가서 놀아 이눔들아! 아빠 지금 짜증나서 힘들어. 화도 나고 죽겠어…."

아이들은 공연히 화를 내고 있는 아빠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후 내내 풀이 죽어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하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가기로 했습니다.

산책길에서 인효와 인상이가 번갈아 물어 왔습니다.

"아빠! 왜 화내고 그려…."
"화내니까 기분이 안 좋지?"

아이들은 내가 평소 자신들에게 했던 말을 되물어 왔습니다.

"응. 가슴이 답답하고 안 좋아. 기분이 더러워…."

나는 아이들이 내게 대답했던 것처럼 똑같이 대답하고 있었습니다. 평소 두 녀석이 화를 내고 있으면 내가 그렇게 물어봤고 녀석들 또한 그렇게 대답했었거든요.

"너희들은 자식아 아빠보다 열 배, 백 배 훨씬 더 화내고 그러잖아. 아빠도 마찬가지여. 너희들 화내고 서로 싸우고 그러면 아빠도 기분 안 좋아. 불안하고…. 우리 서로 화내기 시합할까? 누가 더 화 잘 내나."
"아, 아니…."
아이들이 손사래를 쳤습니다.

돌아오는 산책길에서 얼마 전에 오가피나무를 몽땅 캐갔던 동네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나는 정중하게 사과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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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동네인심을 사납게 하나


"아저씨, 거시기 저번에 큰 소리 쳐서 죄송하네요. 그냥 뽑아 가셔도 상관없는 것인데…."
"아, 아녀. 그럴 수도 있지 뭐."
동네 아저씨는 되려 미안해했습니다.

a 난데없이 봄에 피는 애기똥풀꽃이 피었습니다.

난데없이 봄에 피는 애기똥풀꽃이 피었습니다. ⓒ 송성영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서 담장 밑에 핀 아기똥풀 꽃이 반갑게 반겼습니다. 때가 이른 것인지 아니면 때가 늦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꽃이 참 이뻤습니다.

고개를 옆으로 조금만 돌리면 세상 만사가 고통스러운 일들뿐인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이 이래저래 그야말로 고(苦)입니다. 하지만 시선을 내 안으로 돌려 요동치는 마음을 잠재우면 세상 모든 것들이 평화롭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있는데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그럽니다.
"인천 사는 정임이가 우리 집에 꼭 한번 찾아 오겠데. 세상 참 좁지. 그동안 갑사를 수차례나 왔다갔다네 글쎄."

인천에 사는 정임씨는 아내의 아주 오랜 친구입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내와 몇 년 동안 서로 연락을 끊고 살아왔습니다. 우리 집에서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갑사를 수차례 왔다 갔다는데 한번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아내는 책을 통해 그동안 연락을 끊고 살았던 사람들을 수소문하고 있었습니다. 적게 벌어먹고 사는 것이 뭔 자랑거리냐 했던 아내는 이제 적게 벌어먹고 사는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했습니다.

<거봐, 비우니까 채워지잖아>는 결국 아내를 위한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그 책 한 권을 통해 그동안 고생고생 살아왔던 시골 생활에 대해 보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적게 벌어먹고 살아오면서 겪었던 온갖 '고생'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보람'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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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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