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 순으로 바뀐 지가 언젠데...

교육부와 언론의 어이없는 '출석부 타령'

등록 2003.11.13 19:42수정 2003.11.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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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생 출석번호 가나다순으로."

12일치 신문 대부분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한국경제> 11월 13일치 A9면 기사.
<한국경제> 11월 13일치 A9면 기사.한국경제닷컴
이 신문들은 교육부에서 낸 보도자료대로 "생년월일 순으로 하던 초등학생 출석번호가 가나다순으로 바뀌게 된다. 교육부는 '출생일순에 따른 출석번호 부여가 따돌림 등 인권침해를 유발할 소지가 있다'는 국민제안을 받아들여 내년부터 성명(가나다)순에 의한 출석번호를 부여하기로 했다"는 내용을 적었다.

그런데 12일 아침 신문을 받아든 상당수의 초등교사들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서울지역 대부분의 초등학교는 20~30년 전부터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를 매겨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강원, 충남, 충북, 제주 등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 시기별 편차는 있지만 상당수 지역은 이미 '생년월일' 대신 '가나다'순으로 번호를 매기고 있다.

서울교육청 초등교육과의 한 중견간부는 "아마 서울지역 대부분의 초등학교가 이미 수십 년 전에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를 적어왔을 것이다. 생년월일순 출석번호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13일 전화통화에서 말했다. 이같은 지적은 직접 만난 10여 명의 서울지역 초등교사들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현재 서울엔 540여 개의 초등학교가 있다.

원유림 춘천초 교사는 "몇 개 학교를 옮겨 다녔는데 생년월일에 따른 출석 번호는 본 적이 없다. 가나다순으로 바뀐 지가 언젠데, 교육부와 언론이 옛날 얘기를 하고 있느냐"고 반문했다.

물론 경기와 인천, 부산, 전남 등지는 상당수 학교에서 '생년월일'에 따른 출석번호 매기기 관행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이 지역 또한 교사 또는 교장 재량에 따라 일부 가나다순으로 출석번호를 매기는 경우도 있었다.


실태 조사 생략한 교육부, 검증 안한 언론

사정이 이런데도 왜 교육부는 마치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가 '생년월일 순으로 출석번호를 적는 것'처럼 기자들한테 알렸을까. 교육부는 보도자료에서 "이러한 초등학교 출석번호 부여 방법의 개선은 참여정부의 제도개선 우수사례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자랑까지 했다.


취재결과 교육부는 출석부 번호 매기기 관행에 대한 실태조사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채 이 같은 내용을 보도자료로 낸 것으로 드러났다.

교육부 학교정책과 담당자는 "인터넷 국민제안에 따라 합당한 것으로 보여 생년월일에 따른 출석번호 부여 관행을 지양하도록 결정했다. 사전에 출석번호에 대한 실태조사는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언론보도도 이상하고 교육부 보도자료도 가공 단계에서 잘못 나왔다"고 덧붙였다. 그에 따르면 교육부는 '생년월일에 따른 출석번호 부여를 지양하라는 것일 뿐 가나다순으로 번호 매기기를 하라고 결정한 바 없다'는 것이다. 현재 출석번호 차례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은 학교장과 학교에 있는 상태다.

확인취재를 생략한 언론의 교육현장 보도 태도 또한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13일치 지면에서도 <동아일보>와 <한국경제>는 논설위원 칼럼까지 쓰며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뤘다. 하지만 사실 자체에 대한 검토 없는 주장은 공허했다.

더구나 <한국경제> '천자칼럼'의 다음과 같은 내용은 학교를 조금만 들여다보려고 했다면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얘기다.

"출석부엔 아이들의 이름, 사진, 집주소와 전화번호, 휴대폰 번호, e메일 주소까지 실린다. 선생님은 출석부를 통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고 익히고 각각의 특성, 학업태도, 가정상황 등을 파악한다."

물론 이 내용은 대부분 틀리다. 출석부엔 아이들의 이름밖에 없다. 집주소와 전화번호, e메일 주소 등은 생활기록부나 교사의 수첩에 적혀 있다. 또 이름밖에 없는 출석부를 보고 '아이들의 특성, 학업태도, 가정상황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을 가진 교사도 없다.

출석부 논란에 대해 황진우 전교조 초등위원회 사무국장은 "교육부가 학교를 모른 채 몇몇 직원들의 아이디어 차원에서 정책을 내 놓고 언론은 이를 검증 없이 받아쓰는 것은 문제"라고 말했다.

황 국장은 또 "이미 대부분의 학교가 그렇게 하고 있지만 뒤늦게나마 출석부의 번호까지 바꿔 아이들의 인권을 보호하겠다는 생각만큼은 칭찬할 만하다"고 덧붙이면서 "학생 인권보호 차원에서라도 교육부가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해결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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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에서 교육기사를 쓰고 있습니다. '살아움직이며실천하는진짜기자'가 꿈입니다. 제보는 bulgo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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