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는 희망을 담을 수 있어서 좋다"

[노동자를 찍는 여성들 1] <이주>의 주현숙 감독

등록 2003.11.18 02:06수정 2003.11.19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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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이 지난 8월 16일 최종 공포되어 내년 8월부터 시행된다. 그에 따라 국내 체류기간 4년 이상(2003년 3월 31일 기준)의 노동자들은 11월 15일까지 자진 출국해야 했다.

a 주현숙 감독

주현숙 감독 ⓒ 송민성

법무부가 '1년 이하의 징역, 500만 원 이하의 벌금 조치' 등 강력한 단속에 나설 것을 발표했지만, 불법체류자로 낙인 찍힌 출국대상자는 무려 7만여 명에 이른다.

대부분의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번 단속 역시 '예전처럼 금방 수그러들겠지'하는 마음에 임시 방편으로 생필품을 사들고 어딘가로 숨어들었다. 또 그 가운데 몇몇은 '강제추방 반대와 노동자 합법화'를 외치며 농성에 들어갔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주노동자들에게는 쉽지 않고 두려운 일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국에서 죽거나 다칠 수도 있고, 돈을 벌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은 당장 떠날 돈이 없어서, 빚이 많아서, 임금을 받지 못해서 혹은 억울해서 등 많은 이유로 한국을 떠나지 못한다.

이런 분위기 탓에 반복되는 이주의 악순환을 그린 다큐멘터리 <이주>의 주현숙 감독의 마음은 더욱 착잡하기만 하다.

그들은 왜 다시 돌아오는가

이주노동자의 삶과 애환을 그린 옴니버스 영화 <여정>은 모두 네 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첫 번째 이야기 <이주>가 주현숙 감독의 작품이다. 사실 처음부터 그가 이주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림동에서 살면서부터일 거에요. 거긴 중국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거든요. 설날, 추석같은 명절이 되면 공동화 현상이 일어나면서 중국 사람들만 남아요. 중국 노래도 들리고…. 어느날 식품점 주인 아주머니께 '참 재밌는 곳'이라고 했더니, 되려 '무서운 사람들'이라고 도리질을 치시더라구요."

아주머니의 사연인즉슨, 중국인들은 곧잘 칼을 휘두르며 싸우곤 하는데 아무리 심하게 싸워도 2분이면 찔린 사람도, 찌른 사람도, 구경하던 사람도 모두 사라진다는 것이다. 불법체류자들은 문제가 있어도 드러내 놓고 해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니는 길을 그들은 불안에 떨며 걷고 있었던 거죠. 그때부터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할까'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고민들이 나를 사로잡았죠."

카메라를 믿지 못하는 이주노동자들

주 감독은 작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들고 이주노동자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마석의 한 이주노동자 집에서 함께 머무르면서 많이 친해졌어요. 그런데도 카메라만 들면 눈치를 보며 슬슬 피하더라고요. 섭섭한 마음에 '왜 그러냐, 날 못믿냐'고 했더니, 그 분이 '나는 믿지만 카메라는 믿지 못하겠다'라고 말하더군요."

a 늦은 저녁을 먹고있는 이주노동자들

늦은 저녁을 먹고있는 이주노동자들 ⓒ 송민성

이미 한국언론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진 그들에게 주 감독의 카메라가 쉽게 통하지는 않았다. 한 이주 노동자에게 "한국 미디어 싫어"라는 말을 듣고나서 그들의 상처와 불신이 얼마나 깊은가를 새삼 깨닫게 됐다는 주 감독.

그러나 한가지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않은 수의 노동자들이 본국으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 이주노동자들이 20대 젊은 나이에 와요. 그야말로 청춘을 쏟아붓는 거죠. 하고 싶은 것 다 참아가면서 한국에서 일하고 한국 사회에 적응해가죠. 그러다보면 정작 본국의 상황이 어떤지 잘 몰라요. 한국에서 애써 모은 돈을 몽땅 사기당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죠."

그는 알고 싶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한국을 다시 찾게 만드는지. 본국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그의 이런 호기심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해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방글라데시로 날아갔다.

"내게 미디어는 곧 운동"

주 감독은 이때 만난 방글라데시 노동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가한국에서의 이주노동을 통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은 '열심히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노동의 기쁨과 '나라를 잃은 기분'이라고.

"7년동안 한국에 있다 왔는데, 방글라데시가 자기 나라 같지 않더라는 거죠. 기후도 맞지 않고, 일자리도 없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더래요.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그렇다고 한국은 뭐 자기 나라인가요? 이처럼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는, 어느 쪽의 구성원도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주의 본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a "Stop the crackdown!"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선전전을 하고있다.

"Stop the crackdown!"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선전전을 하고있다. ⓒ 송민성

주 감독은 이러한 내용을 담아 <이주>라는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미디어는 곧 운동'이라고 말하는 주 감독은 다큐멘터리의 매력에 대해 "보는 이들에게는 진실한 삶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찍는 자신에게는 끊임없이 세상에 대해 공부하도록 채찍질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운동 방식"이라고말했다.

"내가 찍은 다큐를 본 사람들이 어떻게 바뀌기를 기대하고 작업을 하지는 않아요. 전 그리 낙관적인 사람이 못되거든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다큐를 찍는 거죠."

그가 다큐멘터리를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희망'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도 처음에는 이주노동자들에게 '힘들죠?'라는 질문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괜찮대요. 그것은 그들이 정말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에요. 이미 고통과 두려움, 분노가 가슴 깊이 쌓여 있기 때문에, 피처럼 흐르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들은 웃고 이야기해요. 힘든 와중에도 웃음을 잃지않고 조금씩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모습, 저는 그 힘을 참 사랑해요."

그가 지금 찍고있는 새로운 다큐멘터리 역시 이주노동자들이 자신의 부당한 현실을 깨닫고,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를 깨달아가는 모습 즉, 정체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변화해가는 과정을 주제로 하고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1월말까지 편집을 끝냈어야 할 다큐멘터리를 주 감독은 지금껏 붙들고 있다. 내년 3~4월쯤에나 완성될 것 같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지금의 상황을 함께 담는 것도 의미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 감독은 벌써 다음 작품을 생각해두었다.

"제 주변에 가출 소녀들이 좀 있거든요. 전 그 아이들의 현재 하고 있는 경험도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얘기해요. 그 친구들이 만드는 공동체가 하나의 가족 형태로 볼 수 있다고도 일러주죠."

그러나 아직도, 한참은 이 곳을 떠날 수 없을 듯하다. 어설프게 지어놓은 천막 하나만으로도 기뻐하는 사람들 속에서 그는 여전히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국인이나 유럽인이었다면..."
'강제추방저지·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단' 선전국장 마붑

▲ 선전국장 마붑
ⓒ송민성
인터뷰를 하는 동안 주현숙 감독의 카메라는 그의 몫이었다. 주 감독은 그를 말리는 대신 "열심히 찍어요"라며 격려해주었다. 주 감독은 그를 '"자신의 조감독이자 농성단의 마스코트"라고 소개했다.

그는 바로 '강제추방저지·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한 농성투쟁단' 선전국장 마붑(Mahbub)이다. 방글라데시인인 그는 4년전 한국으로 와서 나무공장, 원단공장 등에서 일했지만 몇 달 전 퇴직금도 받지못하고 해고된 상태이다.

- 합법노동자로 등록할 수도 있었는데 왜 신고를 하지 않았나?
"고용허가제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고용허가제에 따르면) 일자리를 옮길 자유도 없고 사장이 해고하면 그냥 나가야하는데 그것은 불합리하다."

- 한국에서 일하는데 있어서 어려운 점은 무엇이 있었는가?
"처음에는 나라 생각도 많이 나고 말도 못해서 힘들었지만 그런 것들은 오래지않아 적응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하루에 12시간씩 일하면서도 야간수당, 잔업수당 등을 한푼도 받지못했다는 점이다.

한국인들 다 노는 휴일과 명절은 물론 노동절에도 일을 해야했다. 노동자를 위한 노동절에도 일하게 하는 것은 우리를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 어떻게 해서 농성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남양주시에서 일하면서 친구들끼리 여러 가지 문제를 함께 고민했다. 그때부터 서서히 이주노동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눈뜨기 시작했다. 이번 해에 한 친구가 다쳤는데 우리끼리 힘을 합쳐 돈을 모았다.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것의 가능성을 느꼈다.

- 왜 농성을 하고 있는가?
"알리기 위해서다. 우리의 현실을 알리고 우리의 요구를 말하기 위해서다. 최근 두 명의 이주노동자들이 자살을 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은 미국인이나 유럽 사람이 아니니까 주목하지 않는거다. 우리가 좀더 일찍 농성을 하고 투쟁을 했다면 그들이 죽지 않았을텐데 미안하다.

- 앞으로의 계획은?
"하루 빨리 고용허가제가 폐지되었으면 한다.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이다. 잡혀갈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가족들은 모른다. 그런데도 돌아오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투쟁이 끝날 때까지 가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머물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여기서 싸울 것이다." / 송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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