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품위있게 감상합니다"

주인과 함께 공연 감상하는 시각장애인 안내견

등록 2003.11.18 11:44수정 2003.11.18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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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오후 3시 여의도 영산아트홀에서 열린 세계적 첼리스트 레슬리 파나스 연주회에는 특별한 손님들이 초대되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시각장애인.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 역할을 하는 안내견들도 함께 초대되었다.

a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레슬리 파나스

연주에 열중하고 있는 레슬리 파나스 ⓒ 이철용

제네바, 뮌헨, 카잘스,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의 화려한 이력을 가진 레슬리 파나스의 연주회를 기획한 한국아카디아는 '모든 공연의 공연장 맨 앞좌석 1열은 시각장애인들과 안내견을 위해 비워둔다"는 방침에 따라 이번 공연에도 시각장애인들과 안내견을 초대했다.

연주가 시작되기 20분 전 안내견 2마리가 연주회장 입구에 도착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모아졌다. 어떤이는 "어, 개가 들어왔네"하고 작은 소리를 내기도 했다. 안내견과 함께 방문한 시각장애인들은 기획사로부터 초청을 받은 시각장애인과 안내견들.

a 안내견도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안내견도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고 있다. ⓒ 이철용

이들은 지난 5월 춘천의 한림대 일송아트홀에서 열린 뉴욕시티 오페라단의 성악가 이윤아 초청 연주회를 계기로 인연을 맺어 이번 공연에도 함께한 것이다. 기획사는 공연장의 맨 앞좌석을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에게 할당하려 했지만 공연장 측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한다 해서 할 수 없이 2층의 별도 공간에서 관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초대된 대부분 시각장애인들은 춘천의 이윤아씨 공연과 지난 10월 말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있었던 일본인 시각장애인 다케시 가케하시의 연주회에 이어 이번 공연을 관람하게 되었다.

a 전숙연씨

전숙연씨 ⓒ 이철용

92년 사고로 중도실명이 된 전숙연(45)씨는 "춘천공연과 예술의 전당 공연에 이어 오늘의 공연에 초청해 준 단체에 감사를 드린다"며 "전에는 공연장 출입에 어려움이 많았지만 요즘은 인식이 많이 달라져 수준높은 공연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그는 또 "시각장애인들과 비장애인들이 같은 좌석에 앉아서 공연을 관람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아직 안내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어쩔 수 없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전씨는 98년 세종문화회관에서 클라리넷 연주회를 관람하려고 하다가 안내견은 함께 입장할 수 없다는 직원들의 제지로 인해 안내견을 관리실에 맡겨야 했다. 안내견은 주인과 떨어져 있을 때 극도의 불안감을 일으키는데 그 후 공연장을 찾을 때는 안내견을 집에 두고 다닐 정도였다. 97년부터 안내견과 생활했다는 전씨의 얼굴에는 안내견 '대양'이와 함께 공연을 감상하게 된 기쁨이 묻어 나왔다.


공연직전 시각장애인들과 안내견들은 관계자의 안내에 따라 2층 별도의 공간으로 안내되었다. 안내견들은 다른 안내견을 만나자 모두 한 곳에서 훈련을 받은 탓인지 반가움에 어쩔줄 몰라하기도 했다.

a 별도의 공간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별도의 공간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 이철용

연주가 시작되자 객석은 숨죽인 듯 고요했다. 안내견들이 연주에 방해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 생각은 기우였다. 안내견 한 마리는 고개를 들고 무대를 계속 바라봤고 다른 4마리의 안내견은 조용히 주인의 발과 좌석에 납작하게 업드린 채 감상인지 졸음인지 눈을 감고 공연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a 노영관씨

노영관씨 ⓒ 이철용

간간히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날 때면 시각장애인들은 자신의 안내견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안내견들은 이내 조용히 업드렸다. 좁은 공간인데도 안내견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중도장애를 입어 실명을 한 노영관(27)씨는 정장을 하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연주에 빨려 들어갔다. 현의 울림에 눈꺼플과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며 온 몸으로 감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예전에는 공연장에 안내견과 들어갈 수 없었지만 요즘은 인식이 좋아져서 특별한 어려움은 없다"며 "서울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지방은 힘들다"고 불편함을 토로했다.

좌석에 대한 만족도를 묻자 "이 정도면 괜찮다"며 "기둥 뒤 같은 상식적으로 불쾌감을 주는 자리만 아니라면 특별한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이윤희(29)씨는 "오늘의 공연은 물론이고 가수 김장훈의 공연에도 불편없이 참가했다. 그러나 예전에 이소라씨 공연에서 경비원들이 안내견의 출입을 막아 기획사 직원들이 나서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연주회장은 물론이고 일상 생활에서도 아직은 불편함이 많다. 한번은 지하철을 타고 있는데 한 노인이 개를 옆에 둔다고 호통을 치는 바람에 자리를 옮겨야 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연주회 중간 휴식시간이 되자 시각장애인들과 안내견들은 다시 반가운 인사를 나눴다. 한 시각장애인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내견을 집에 두고 왔다며 후회하기도 했다.

a 레슬리 파나스가 시각장애인에게 정성스런 사인을 하고 있다.

레슬리 파나스가 시각장애인에게 정성스런 사인을 하고 있다. ⓒ 이철용

거듭되는 앵콜 공연 끝에 모든 공연이 끝나자 레슬리 파나스는 영산홀 로비에서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사인을 했다. 사인 도중 레슬리 파나스는 안내견과 함께 사인을 받기 위해 손을 내민 시각장애인의 손을 잡고 감격적인 인사를 나눴다. 시각장애인은 영어로 공연의 감동과 인사를 전했고 레슬리 파나스는 사인과 함께 용기의 말을 잊지 않았다.

안내견들을 교육하는 삼성화재안내견학교 이성진 과장은 "안내견으로 사용하는 '네트리비'종은 태어난 지 7주부터 일반 가정에서 퍼피워커(시각장애인 안내견 자원봉사자)에 의해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일으키지 않도록 사회성 훈련을 받기 때문에 연주회에서 돌발 사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 한국의 시각장애인 안내견은 사회공익 차원에서 유일하게 삼성화재안내견학교가 무상으로 보급하고 있다. 1세 되는 '네트리비'는 6~8개월간 훈련을 받고 시각장애인과 1달의 적응훈련을 한 후 이들과 함께 생활하게 된다. 현재 49마리가 안내견으로 활동하고 있고 30마리가 훈련 중이다. 1년에 15마리 정도가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

a 공연전 연주홀 밖에서

공연전 연주홀 밖에서 ⓒ 이철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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