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총련 수배자의 '누나결혼식 참석 작전'

성명서 발표하는 등 치밀한 사전계획... 학생들, 식장까지 엄호

등록 2003.11.24 23:59수정 2003.11.25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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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22일 오후 1시


a 기자회견 모습

기자회견 모습 ⓒ 황영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정치수배자가 된 학생이, 누나의 결혼식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서울산업대학교 부총학생회장인 홍기웅씨는 지난 11월 22일 학생회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누나의 결혼식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자리에 함께 한 학교 기성회노조, 민주노동당 노원지구당, 20대 총학생회 선본 공동 명의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 발표가 끝난 후 서울산업대학교신문 송수연 기자와의 질의응답이 진행되었다.

- 올 초 한총련 수배해제가 긍정되다가 근래에 와서 강경대응으로 선회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를 직접 느끼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합법화가 공론화 되던 시기에는 합법화와 수배해제에 대해 기대하지 않았는가? 정부측이 강경대응으로 선회된데 대한 앞으로의 입장은 어떠한지?
"기자 말처럼 많이 기대했고, 한총련 합법화와 이적규정 철회가 이루어지고, 이를 통해서 국가보안법 철폐와 이남사회의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을 기대했다.

정부 얘기처럼, 11기 한총련 대의원들이 연행되고 있고, 노무현 정권이 당초 이야기했던 부분들이 기대했던만큼 얘기되지 않고 있다. 이야기 해야할 부분은 이후에 계속하겠다."


- 부모님께 드릴 말씀이 있는가?
"부모님께 정말 죄송하다. 앞으로도 부모님 믿으면서 살아가겠다. 오늘 집에 안 오면 결혼식 오지 말라고 하셨다.

연세대에서는 현재 한총련 합법화와 이적규정 철회를 위한 수배자들의 무기한 천막농성을 진행중이다. 우리학교에서도 이러한 흐름을 만들어가려고 한다."



2003년 11월 23일 오후 4시

a 결혼식장으로 가는 홍기웅씨

결혼식장으로 가는 홍기웅씨 ⓒ 황영하

오후 3시로 예정된 결혼식 참석을 위해 80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산업대학교 교문 안에 모여든 시간은 오후 1시 40분경. 학교 운동장에는 휴일을 맞아 운동을 즐기는 이들이 일부 있고, 주변은 한산하기만 했다.

그러나 경찰의 연행가능성에 대비해 5열 종대로 무리를 지은 학생들은 지하철 7호선 공릉역까지의 약 1km 가량을 대열을 유지하면서 뛰어서 움직였고, 대열을 유지하려다 보니 인도를 포기하고 차선을 점거했다. 이동하는 동안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지만, 이들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7호선 공릉역에서 6호선 태릉역으로, 다시 1호선 석계역에서 을지로입구로 이어진 학생들의 무리는 가는 곳마다 주위를 경계하며 홍기웅씨의 결혼식 참가 사실을 알리고, 미리 준비한 유인물을 나눠주었다.

80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이 대열을 지어 지하철 역사를 이동하고, 혼잡한 지하철에서 한 칸에 몰려 타는 모습에 불쾌함을 표하는 이들도 눈에 띄었지만, 학생들은 죄송하다는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a 누나와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던 홍기웅씨는 사진촬영이 끝나자 깊은 포옹을 했다.

누나와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던 홍기웅씨는 사진촬영이 끝나자 깊은 포옹을 했다. ⓒ 황영하

3시 무렵이 되어 을지로입구에 도착한 학생들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멈춰서 마지막 탐색을 거친 후에야 식장인 S생명 건물 앞으로 옮겨갔다. 식장 앞에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홍기웅씨의 친구들. 결혼식 전날까지도 '집에 들어올 생각이 아니면 식장에도 나타나지 말라'는 말이 나왔지만, 참가하겠다는 본인의 고집에 식장 밖에서 기다리던 중이었다.

친구들은 홍기웅씨를 둘러싼 학생들에 때문에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농담을 던지는 등 반가움을 표현했다.

정장차림의 20여 명과 함께 식장에 들어선 홍기웅씨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게된 가족과 친지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전한 뒤 식이 진행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식이 끝난 후 홍기웅씨를 알아본 친지들과의 인사가 이어졌고, 기념촬영이 끝난 후 누나와 어머니와의 기념촬영을 마친 홍기웅씨는 다시 학생들과 함께 학교로 돌아갔다.

이날 경찰과 학생간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a  가족사진. 기념사진을 몇차례 찍었지만, 돌아서는 아들을 혼내던 어머니는 결국 누나와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식장안으로 아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가족사진. 기념사진을 몇차례 찍었지만, 돌아서는 아들을 혼내던 어머니는 결국 누나와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식장안으로 아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결혼식 참가를 공개하면서 누나에게 쓴 편지

누나에게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벌써 결혼을 하나하고 생각이 들어. 어쩌면 결혼한다는 게 잘 믿기지도 않아. 아마 누나는 더 하겠지.

누나한테 뭔가 해주고 싶었어. 결혼선물이랄까? 그 동안 잘 해 준것도 하나도 없잖아. 뭘 기뻐할까 한참 생각했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고 그래서 썩 글은 잘 쓰지 못하지만 이렇게 편지 한통으로 대신하려고 해. 괜찮지?

아마 누나한테 편지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같아. 그러니까 더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어 우선 축하한다는 말 먼저 해야겠지. ‘결혼 축하해!’

사실 누나 결혼한다고 했을 때 축하한다는 말, 좋은 소리 한번 못해줬잖아. 속만 애타게 하구. 얼마 전엔 결혼식 올 수 있냐고 물어 봤을 때도 시큰둥하게 ‘몰라’ 라고 얘기 했을 때도, 그러면서 이런 말도 했을 거야 사실 엄마, 아빠, 할머니가 더 많이 생각이 난다고…. 가뜩이나 집에서 제사도 많이 지내는데 혼자 하시는 아빠에게 더 많이 미안하다고. 집에 남아계시는 엄마, 아빠가 더 먼저 생각난다고.

이런 것에 비하면 누나 결혼식은 참가하지 못하고 챙겨주지 못하더라도 마음만이면 되지 않겠냐고 했을 때도 엄청 많이 화냈지?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얘기 했었는데….
그 말 하고 엄청 후회했었어
사실 평소에 누나가 나를 많이 이해해준다고 생각했거든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런데 그땐 갑자기 결혼 할 때가 되어서 짜증내고 심술부린다고 생각했지.

누나가 나 때문에 매형식구들에게 창피하다고 이야기 했을 때 나도 많이 속상했어. 나도 이런 생활들이 좋지만은 아닌데….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제대로 가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부모님이 안 계시는데 동생의 결혼식에 한번 가려 해도 쉽지 않았다고 그런 일도 있다고 언제 얘기했지. 사실 이런 얘기도 쉽게 못하겠어. 특히 엄마 아빠한테는 얼마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일까? 저번에 연세대에서 천막농성 할 때 엄마한테 와보시라고 한번 이야기하기가 어찌나 힘든지.

오늘은 아빠한테 전화가 왔어 경찰한테 하루 종일 집에 전화가 왔나봐. 마치 우리가 가서 데모라도 할 것 처럼 이야기 한 것 같아. 오지 말라고 까지 하셨어. 물론 속마음은 안 그러시겠지. 누나 결혼 하는 거 확인전화까지 했다구? 왜 청첩장 안보냈냐구 했다구? 축하해 주려나봐 한총련 수배자가 딱했는지 대신 축하해주려고 했나봐

누나가 그랬지 내가 마치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구?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 아마 그렇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것 같아. 여기서 이런 저런 말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난 말야 누나한테나 부모님한테나 그리고 매형 가족분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부끄럽게 살지 않게. 그동안 내가 잘못한 부분들이 있더라도 앞으론 안 그럴 거야 너무 걱정하지 안했으면 해.
난 지금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거름이 되고자하는 나름대로 아주 큰 꿈도 있어 싱겁게 들리겠지만….

마지막으로 매형한테 고맙다고 이야기 할게요. 우리누나를 위해 평생을 살 분이시니까. 나중에 많은 이야기 더했으면 좋겠어요 저번엔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2003년 11월 22일 동생 기웅이가


학교 선배, 수배 선배가 느끼는 비애
<미니인터뷰> 손우정씨 (16대 총학생회장. 전 한총련 수배자)

▲ '누나에게 쓰는 편지' 를 읽고있던 홍기웅씨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손우정씨
ⓒ황영하
- 전직 한총련 대의원 그리고 수배자였는데, 기자회견을 바라본 느낌은?
"한총련에 대한 이적규정과 탈퇴공작은 97년 김영삼 정권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 임기말기의 국민적 저항을 잠재우는데 사용된 효과적인 전술이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학생들을 ‘빨갱이’로 모는 것이었다면, 이후 50년만의 정권교체라 했던 김대중 정권과 개혁정권이라 했던 노무현 정권은 과거의 무리한 이적규정을 철회할 적극적 의사를 전혀 보이고 있지 않다.

노태우 군사독재 시절에서도 합법적이었던 학생조직이 6월 민중항쟁의 야전사령관이라던 사람이 대통령이 된 현실에서 ‘적을 이롭게 하는 단체’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이 납득 못할 이유를 비이성적인 극우정당과 기존의 국가억압기관의 존재에서 찾는 사람도 있으나 노무현 정권 그 자신 또한 별다른 의지를 보이고 있지 못하다.

한마디로 명분은 없고 관성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학생들에 의해 뽑힌 직선 대표자가 곧 범죄자로 인식되는 이런 웃지 못할 코미디는 정권이 스스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인식을 바로 세우지 않는 한 계속 될 것이다. 나와 같은 과거를 그대로 밟아 나가야 하는 후배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 수배중 연행되었다. 내일 그런 일이 발생할 소지가 있다고 생각되는가?
"내일 수배자 친누나의 결혼식 참여는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되었다. 만일 내일 경찰에서 연행에 나선다면 기본적인 인륜조차도 저버린 행위가 될 것이고, 만일 연행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이적단체 구성원으로 규정한 사람을 자유롭게 활보하게 하는 행위가 될 것이다.

이처럼 내일 경찰이 어떤 행동을 취하더라도 국가보안법의 모순적 현실을 낱낱이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내일 경찰이 연행에 나설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황영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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