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토마토가 빨갛게 익었어요

등록 2003.11.26 16:30수정 2003.11.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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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화분은 입김만으로도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 가벼웠다. 할인매장에서 무엇인가를 사고 사은품으로 받은 화분인데 크기부터가 영 미덥지 않았다. 식물이 자랄 만큼의 공간은 적어도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화분 크기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건 숫제 장난감으로나 적합할 만한 크기였다.


그런데 아이들의 눈에는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할인매장에서 사온 물건을 부려놓고 얼마 지나자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의 눈에 그 장난감 같은 화분이 눈에 띄였는데 당장 씨앗을 심자고 난리였다. 시답진 않았지만 한 번 심어보자고 동봉된 흙을 넣고 씨앗을 뿌린 뒤 베란다에 두었다.

우리집 베란다는 볕이 참 잘 든다. 앞이 탁 트인게 여간 볕이 잘 드는 게 아니다. 하긴 그거 하나는 마음에 쏙 드는 집이다. 도시에 살면서 그것도 다닥다닥 붙어 있는 빌라 촌 속에서 이렇게 시야가 탁 트인 곳도 드물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시답잖은 화분에서 몇 개의 싹이 올라왔다. 좁은 화분 속에서 공존이라니, 너무 밀집되어 있는 것 같아서 제일 튼튼해 보이는 싹만 두고 모두 뽑아 버렸다. 아이들은 두 그루쯤은 키워도 될 텐데 하나만 남겼다고 투덜댔지만 화분은 공존의 법칙이 통할 것 같지 않은 흙과 영양분으로 채워진 폐쇄 공간이었다.

여름, 매미가 오고 있었는데 잦은 비로 햇살을 받지 못하고 쭈삣하게 키만 자란 방울토마토 화분이 너무 안쓰러워서 창가에 두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다. 입김만 불어도 훅! 날아가 버릴 만큼 가벼운 화분이 정통으로 매미라는 괴력의 바람 앞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화분은 그대로 곤두박질쳐서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키 큰 싹이 무참하게 부러진 채였다. 아이들은 비명을 질렀고, 나는 속이 좀 상했지만 어차피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화분이 그만큼 자란 것도 대견했지 싶어서 구석에 화분을 밀어 두고 며칠이 지났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린 여름이 지나면서 햇살이 많아졌다. 어느 휴일 아침, 베란다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탄성에 놀라 바라보니 아이들은 그 방울토마토 화분을 껴안고 좋아서 난리를 치고 있었다.

나도 놀라서 화분을 들여다보니 부러진 본가지 옆으로 희망의 싹이 너무도 씩씩하게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선가 '폭풍우 몰아친 들에도 꽃은 피고'라는 멘트가 들려오는 듯했다.


발그레 익은 열매가 보이지요? 갖은 풍상 다 겪었답니다.
발그레 익은 열매가 보이지요? 갖은 풍상 다 겪었답니다.
짧은 가을이 오고 가는 줄도 모르게 물러나는 동안 방울토마토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그것도 네 개씩이나 주황색으로 맨 먼저 홍조를 띄운 녀석은 벌써 익은 열매를 보여 주면서 지난여름 겪은 일쯤은 벌써 잊었노라고 말하는 듯하다. 단풍으로 변하는 몇몇 이파리를 달고 본 가지의 상처는 깊숙이 감춰둔 채 열매가 맺었다.

겨울이 오고 있다. 지난여름 매미에 할퀸 상처를 싸매고 있는 이웃의 모습이 궁금하다. 어느 정도 복구는 되었는지, 몇 푼의 성금만 쥐어 주고 우리는 그들을 한구석에 밀어둔 채 잊고 지내는 것은 아닌지,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방울토마토 열매를 보면서 힘찬 응원가를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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