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로 만난 인연, 그리고 해후

등록 2003.11.30 23:16수정 2003.12.01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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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19일 어둑어둑한 새벽, 백제문화를 찾아서 '역사기행'을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억지 아닌 억지로 합류하게 된 것은, <오마이뉴스>를 통해 인연이 된 아우를 만나고 싶은 일념 때문이었다.


버스는 '코리안 타임'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오전 7시 30분 정확한 시간에 출발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 사이로 부는 바람이 스산함을 더해 주고, 추수 끝난 들에는 억새풀 하얀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허허로운 들판에는 배추와 무, 갓, 파 등 김장 채소들이 농촌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a 마당을 지키는 된장 항아리들

마당을 지키는 된장 항아리들 ⓒ 김재경

꿈에도 잊지 못한 내 고향 부여!

역사기행 길은 생각보다 길고 멀었다. 젓갈 시장으로 명성을 떨치던 충남 강경을 지나서 아우가 생활한다는 곳은, 부여라기 보단 서천 방향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었다.

그림 같은 송정 저수지를 끼고 대관령 고개처럼 굽이굽이 돌아서, 지금은 폐교가 된 옛 삼성초등학교에 도착했다. 아이들 함성으로 넘쳤을 운동장에는 토속적인 전통 항아리들이 조회서는 학생들처럼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다. 여기저기 흩어진 낙엽을 밟으며 단아해 보이는 여성이 버스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a 아우(왼쪽)와 함께

아우(왼쪽)와 함께 ⓒ 김재경

직감으로 오마이뉴스를 통해 인연이 된 아우임을 알 수 있었다. 아우의 안내를 받으며 걷는 화단 길목에는 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있다. 가랑잎을 밟을 때마다 갈그락 갈그락 소리가 정겹기까지 했다. 아이들이 재잘대며 뛰어 다녔을 긴 복도를 따라 교실로 들어갔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충분한 음식들이 맛깔스럽게 옹기 뚜껑에 담겨져 있었다. 정갈한 김치·깍두기에 버섯나물, 삭힌 고추며 고구마 순, 멸치볶음…. 무엇을 먹어도 입에 짝짝 붙는 감칠맛이다.

가마솥에서 장작불로 금방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하지만 50명분의 밥을 일일이 공기에 퍼담는데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a 맛있게 식사하는 일행들

맛있게 식사하는 일행들 ⓒ 김재경

갑자기 몰려든, 시장기 가득한 인파의 어수선함 속에서 아우는 된장찌개를 퍼나르기에 바빴다. 잠시 후, 우리는 가벼운 포옹으로 서로의 인사를 대신했다.

누룽지와 숭늉이 나오며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가방 속에서 준비해 간 '비타민C와 아이 장갑'을 건넸다. 아이가 있는 걸 알았으면서도 과자 하나 준비 못한 내 짧은 생각을 자책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아침식사 대용이었던 간식을 꺼내는 내 손길이 부끄럽기까지 했다.

동동거리던 아우는 초면이었지만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이처럼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끈끈한 피가 통하는, 오래 전부터 알았던 혈육 같았다.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가마솥 옆에는 길다란 줄에 곶감이 걸려 있었다. 아우는 일행들에게 맘껏 따먹으라며 후덕한 인심을 보였다.

a 가마솥에서는 옛정취가 풍긴다.

가마솥에서는 옛정취가 풍긴다. ⓒ 김재경

교실을 개조해 만든 부엌에는 우리가 맛있게 먹었던 누런 호박전을 부치는 아낙들이 있었다. 염치 불구하고 아우가 사는 방문을 슬며시 열어 보았다. 좀 어두운 공간이다. 겨울이 더 추울 것 같고, 냉기가 스며들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고향의 향수와 산촌의 낭만을 생각한 철없는 나였다.

아우는 이 생활에 적응되었다고 하지만, 주거전용인 아파트만 할까? 순간, 편안한 내 삶이 부끄럽고, 이 곳에 순응하며 긍정적으로 사는 아우가 대견스럽기까지 했다. 아우와 따뜻한 말 한마디 차 한잔 나누지 못한 채 부여기행을 서두는 버스에 탑승했지만,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아쉬움에 잠시 버스에서 내리는데 아우의 모습이 보였다.

쇼핑백 가득 무엇인가를 건넨다. 얼결에 사양도 고맙다는 인사도 못하고 받았다. 어머니 생전에 고향집에서 느꼈던, 정이 묻어나는 선물을 아우는 내게 슬며시 건넸던 것이다.

저녁 8시, 안양에 도착했을 때 콧등이 찡해지며 울컥 목이 메인다. 요즘 내 건강이 좋지 않다고 했기에 보낸 듯 깍두기며 깻잎. 삭힌 고추 반찬까지… 아우의 넓은 마음은 고마움에 앞서 내 맘을 무겁게만 했다.

a 아우가 보내준 고추가루와 반찬들

아우가 보내준 고추가루와 반찬들 ⓒ 김재경

평소 나는 아이들을 무척 좋아해서 복지 시설을 종종 찾으며 누런 콧물 줄줄 흘리는 녀석들과도 쉽게 볼을 부비며 사랑을 나누었다. 하지만, 어쩌다가 아우의 사랑동이는 손목조차 잡아보지 못하고 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언니 노릇 못한 무능함에 부끄러워 메일을 보낼 엄두도 못 내고 있는데 아우한테 먼저 메일이 왔다.

"그 동안의 인연 때문인지 낯설지 않고 너무 반가웠어요. 그렇게 보내고 나서 맘 한구석이 너무 허전하더군요."

공주 답사에서 시간이 지체된 탓에 더 머물 시간이 없어 짧은 만남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우는 마음이 순수한 글쟁이일 뿐, 장사꾼은 못된다는 생각이 줄곧 내 뇌리 속을 맴돈다. 메일로 내 생각을 전할까 하다가 만나기 전에 도시인들에게 '김장 김치' 판매를 구상하던 메일이 생각나서 전화로 주절주절 이야기를 했다.

"이참에 된장이나 김치 홍보도 좀 하지 그랬냐"고 면박에 가깝게 지적을 했다. 친동생처럼 생각되어 한 시간 정도 설교를 했는데 오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우가 준 고춧가루는 약 한 번 안친 것이라고 했다. 무공해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심어만 놓고 방치해 두었기에 자연스레 무공해가 되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나는 무생채를 했다. 아우가 준 고춧가루는 맑은 공기 속에서 자란 태양초였기에 생체 빛깔이 너무 곱고, 매콤한 향 또한 일품이었다. 내가 아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며 우리의 인연을 만들어준 오마이뉴스에 새삼 감사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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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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