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셋, 영화의 바다에 뛰어들다

[노동자를 찍는 여성들 3] <노동자다 아니다>의 김미례 감독

등록 2003.12.01 01:16수정 2003.12.02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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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노동자다 아니다> 포스터

<노동자다 아니다> 포스터 ⓒ 김미례

노동자다 아니다

지난 1월 10일 대법원(주심 박재윤 대법관)은 전국건설운송노조 씨케이인프라시스분회 조합원들의 '근로자지위 부존재확신 소송' 상고심에서 '레미콘 노동자는 근로자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업무 내용을 회사가 정하고 근무태도를 교육받는 등 업무수행 과정이 고용관계와 유사하다는 사실만으로는 운송 차주들이 근로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앞서 2001년 인천지법은 "운송차주들이 독립된 운송사업자로 볼 수 있는 면이 있음은 부인할 수 없"으나 운송 차주들의 근무내용과 방식 등이 회사측에 의해 정해지는 현실을 고려할 때 "노조법상의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뿐만 아니라 전국건설운송노조는 2000년 9월 설립 당시 이미 영등포구청으로부터 합법적인 설립신고필증을 받았다.

이처럼 레미콘 노동자에 대한 법적 해석이 엇갈리는 데 반해 <노동자다 아니다>를 만든 김미례 감독의 답은 명쾌하다.

"그들은 노동자입니다."

서른 셋, 영화의 바다에 뛰어들다


김미례 감독은 97년 <대구건설노조 투쟁기록>으로 독립영화 제작에 뛰어들었다. 일용직 목수인 아버지의 하루를 기록한 단편 <해뜨고 해질 때까지>(2000),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나는 날마다 내일을 꿈꾼다>(2001), 그 후속 격인 <동행>(2002)으로 이어지는 필모그라피는 그가 꾸준히 '주변 노동자'에 시선을 두어왔음을 증명한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에요. 작가든, 감독이든 자기 이야기부터 하게 되잖아요. 일용직 목수인 아버지를 보면서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내가 여자니까 여성노동자들의 어려움도 좀더 와 닿았던 거죠."


김 감독이 처음부터 독립영화 감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던 그는 독일 문학과 철학을 폭넓게 공부하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절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는 "떠올리기 벅찬 기억들로 인해 길을 잘못 들었다"는 말로 구체적인 설명을 대신했다.

그런 그에게 영화의 매력을 처음으로 보여준 작품이 독일 표현주의 영화의 대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였다. 김 감독은 그때의 기분을 충격과 감동이라는 두 단어로 정리한다.

"이렇게도 이야기할 수 있구나, 너무 놀라웠죠. 극장에 걸려있는 '한심한' 영화가 주는 단순한 즐거움과는 다른 충격과 감동이었어요."

그 감동을 깊이 간직해온 그가 '하고싶은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영화'를 떠올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a 레미콘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전국 순회를 하는 노동자들.

레미콘 노동자들의 어려움을 알리기 위해 전국 순회를 하는 노동자들. ⓒ 김미례

다큐,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푸른영상, 노동자뉴스제작단을 쫓아다니며 기술을 배웠어요. 프리미어(영상편집도구) 잘 다루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기계를 들고가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나 김 감독이 기술보다 더 중요시하는 것은 영화의 메시지이다. 맨 처음 기획단계에서 그가 자신에게 거듭 확인하는 것도 "이것이 옳은가? 그리고 진심으로 내가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은가?"라는 물음이다. 일단 그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촬영은 한결 수월하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구체적인 인물과 장소 등을 설정해 구성안을 짜죠. 하지만 그 구성안대로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때가 훨씬 많아요. '공식적'인 내용만 되풀이하거나 속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렉(Rec) 상태로 틀어놓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 진실한 말들이 나올지 모르니 그저 기다리는 거죠."

그는 다큐멘터리의 성패는 화면 속의 인물들로부터 얼마나 솔직한 이야기를 끌어내느냐에 달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과 친밀해져야 하고 그 다음에는 신뢰감을 형성해야 한다. <노동자다 아니다>를 찍으면서도 김 감독은 노동자들과 꾸준히 만나고 그들에게 귀기울이면서 신뢰를 쌓아나갔다.

그렇게 2년 동안 레미콘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록이 60분짜리 테이프로 120개가 넘었다. 스캐닝 작업만 두 달이 걸렸다.

"120개가 넘는 테이프를 그때마다 돌려가며 볼 수 없으니까 대사와 장면 하나 하나를 글로 적는데 이 작업을 스캐닝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대본을 보면서 쳐내거나 살릴 장면을 정하죠."

a 김미례 감독의 작업실에서

김미례 감독의 작업실에서 ⓒ 송민성

대본을 보고 편집하는 것과 화면으로 컷편집을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도 수정하거나 재촬영을 통해 추가하는 부분이 생긴다. 때로는 영화의 중심이 달라지기도 한단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고민을 해야되는 거예요. 기획단계에서부터 마지막 편집에 이르기까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죠."

부족한 깊이 채우기

<노동자다 아니다> 역시 끝없는 고민의 결과물이었다.

"작가적 욕심으로는 사람들과 부딪히며 생기는 갈등, 공장에 들어갈 때의 어려움도 담고 싶었죠. 그런데 포기했어요. 이 영화의 주인공은 내가 아닌 '그들'이니까요."

내레이션도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 최병옥씨(건설운송노조 여주·이천 지부장)가 직접 맡았다.

"여주·이천 지부는 11개 중 10개의 사업장이 참여할 만큼 노동자들의 참여가 높았어요. 그런데 거의 와해되다시피 해서 지금은 경기동남부지부의 분회로 소속돼있어요. 최병옥씨는 회사로 돌아갈 수도 있었는데 조합원들 먹여 살려야 한다며 용차 일을 하고있는 분이죠."

최병옥씨는 화면도 보지 않고 그때의 감정을 회상하며 글을 읽어나갔다.

"우리는 레미콘 기사들이다. 레미콘이 만들어지면 90분 이내에 공사현장으로 운반해주는 일을 한다. 레미콘을 공사현장까지 한번 운반해주고 돌아오면 '한탕'을 한 것이다. 우리는 월급이 아닌 한탕에 얼마씩 정해진 운반비를 받는다. 회사와는 1년마다 운반 도급계약을 맺는다. 회사는 우리더러 사장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물은 지난 부산국제영화제, 비정규영화제 '어깨 걸고', 인디다큐 페스티벌 등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김 감독은 그 만남들이 대체로 만족스러웠다고 평가한다.

"특수고용직 노동자에 관한 이야기하면 왠지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야할 것 같은 무거운 느낌이 들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극장까지 와준 관객들이 고맙죠. 적어도 그 분들을 실망시켜드리지는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작업을 했는데 어때요, 그 정도는 한 것 같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남게 마련이다.

"무거운 이야기를 쉽게 담으려다보니 할리우드의 극적 방식을 차용한 부분이 있어요. 부족한 깊이를 치밀한 구성과 극적인 음악으로 포장하려고 했죠. 딱 그만큼이 아쉬워요."

이는 그가 다음 영화에서 극복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일용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많은 문제들 중 어느 것을 끌어내고 기록할 것인가를 아직 고민 중이에요.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형식으로 욕심껏 해보려구요."

김미례 감독은 두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다. '타협해서는 안될 것과 타협하지 말자'와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끝까지 하고 만다'이다. 타협하지 않고 살아가기 힘든 현실에서 '어떻게 당당하게 살아남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그의 모습은 누구보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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