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벽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암자

[지리산기행 2]구례 오산(鰲山) 사성암

등록 2003.12.01 15:43수정 2003.12.02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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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원효, 도선, 진각 등  4대성인이 머물렀던 사성암
연기, 원효, 도선, 진각 등 4대성인이 머물렀던 사성암김대호
사성암 암벽 위에서 섬진강과 구례읍내를 내려보다 아찔한 기분이 들어 후들거리는 다리를 쉴 겸 바위에 주저앉았다.

여행을 다니면서 이미 세상 번뇌로부터 비껴난 스님들과 차를 나누다 보면 출가한 지 벌써 10년째인 친구가 가끔 떠오르곤 한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노파
대웅전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오르는 노파김대호
3년간의 행자생활을 마친 스님은 큰스님의 허락을 받고 3박4일의 바깥 나들이를 나왔다. 큰스님은 얽힌 연을 찾아갈 기회를 준 것일 터이지만 이 스님은 도반을 찾아 서해바다로 왔다.

입천장이 데일 정도로 뜨거웠던 보이차(녹차를 수년간 땅속에 묻어 완전 발효시킨 차)를 마시며 4년을 보낼 강원(講院 스님들의 대학)으로 향하는 착잡한 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첩첩설산에 달빛까지 스며들면 맘은 괜스레 시려 밤빛도 하얗더라"

출가해 수계를 받은 사찰에서 어른 스님들이 주무시고 나면 도반들끼리 잘 익은 송차(松茶)를 챙겨들고 달빛에 낮처럼 환해진 눈밭을 헤치고 폭포까지 갔더란다.

이 젊은 비구니들은 모닥불 피워놓고 시린 한기까지 녹이는 솔향에 취해 아침 예불 시간이 다되도록 악다구니를 쓰며 노래를 불렀단다. 아직 털어 버리지 못한 것들이 많아서였을까?


4대성인이 천하를 굽어보며 참선했다는 신선대
4대성인이 천하를 굽어보며 참선했다는 신선대김대호
이 자리(신선대)가 연기조사를 비롯해 원효, 도선, 진각이 앉아 있었던 자리다. 땅과 하늘을 구분 짓는 이 바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이들은 '하늘을 바칠 기둥(세상을 바꿀 방법)'을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도선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을 원효는 화쟁(和諍)을 일구었다.

염정불이 진속일여(染淨不二·眞俗一如).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며 깨달음과 세속이 별개의 것이 아니다'는 원효의 가르침이다. 현실세계의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 흑과 백, 밤과 낮 등 대립되는 모든 것들이 짐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가는 바탕이 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화쟁(和諍)은 '다툼을 하나 되게 한다' 다시 말해서 '서로 다른 것이 왜 다른지 알게 되면 그 대립을 합리적인 도리에 따라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도선국사가 음양오행의 이치를 깨달은 도선굴
도선국사가 음양오행의 이치를 깨달은 도선굴김대호
독일 철학자 헤겔은 '자신 속에 숨어 있음에도 그 모순을 알아채지 못하고 있는 정(正)의 단계에서 모순이 자각되어 밖으로 드러나는 반(反)의 단계 그리고 모순에 대립하면서 새롭게 결론을 맺는 합(合)의 3단계의 변증법'으로 세계를 설명했다.

헤겔은 정과 반이 부정되고 혹은 함께 살아서 통일된 합을 아우프헤벤(aufheben 지양(止揚))이라 불렀으나 이는 이미 1400년 전 우리의 원효대사가 1200년 전 화쟁이라는 이름으로 밝혀낸 것을 반복한 것에 지나지 않다.

원효대사가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마애불
원효대사가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마애불김대호
나는 이번 여행에서 어떤 화두를 짊어지고 화쟁을 찾아가는 것일까? 친구 스님은 지금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어쩌면 '눈밭에 비친 밤 빛이 하얗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큰 깨우침을 얻어 마음을 다스리고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래도 속세에서 잠시 스친 친구에게 차 한잔 권할 빈틈은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다.

사성암은 구례읍을 마주한 오산 정상 암벽에 위태롭게 걸려 있는 암자다. 오산(鰲山)의 뜻이 바로 ‘자라산’이고 보면 암자는 그 머리쯤 되는 곳으로 보이며 도선국사가 가르침을 얻었다는 도선굴이 열린 눈으로 보인다.

바위틈에 숨어 바로 앞에 가야 볼 수 있는 산신각
바위틈에 숨어 바로 앞에 가야 볼 수 있는 산신각김대호
정상에 오르면 4대 성인이 속세를 굽어 봤을 자리까지 마치 사람이 놓은 듯 돌계단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섬진강이 십여 리는 족히 보이고 드높은 지리산이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할 구례평야가 넓게 펼쳐진다. 내려다보이는 비경이 지리산 노고단과 견줄 만 하다는 것이 사람들의 이야기다.

암벽위에 위태롭게 붙은 사성암 건물들
암벽위에 위태롭게 붙은 사성암 건물들김대호
오산에는 호랑이가 살았으나 훗날 도선국사가 공부했다는 '도선굴', 암자를 껴안고 있는 병풍바위, 산밑 섬진강까지 이른다는 뜀바위 밑 동굴, 4대 성인이 참선했다는 신선대가 장관이다. 또한 바위틈에 숨어 가까이 가서야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산신각, 원효대사가 하늘을 날아 손가락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을 모신 약사전은 바위벽에 법당을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신선대에서 내려다 본 사성암
신선대에서 내려다 본 사성암김대호
마치 곡예를 하듯 암벽에 의지해 있는 구례 사성암에서 나는 오히려 마음에 편해졌다. 어쩌면 내가 이번 여행에서 찾으려고 했던 해답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은 가져가는 지도 모르겠다.

"다음엔 취재는 그만두고 한 며칠 쉬러 오시오."

속세를 향해 계단을 내려가는 내게 이 절에 계시는 혜광스님이 한마디 던지신다. 조급한 내 심사에 '좀더 느리게 보라'는 충고일 것이다. 지고 온 짐을 다시 지고 가는 내 모양새가 애처로워 보였을 수도 있음이다.

'스님, 다음 번엔 좀 더 가볍게 오지요.' 나는 속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정치인들 맘속에는 원숭이가 산다'
사성암에서 만난 혜광스님

▲ 혜광스님의 차 따르는 손
- 나그네가 오솔길 걷는데 왔다고 소리내 인사할 필요 있나요?
"사진 찍기를 정중히 사양하는 사성암 주지 혜광스님의 말씀이다. 겨우 우겨 차 따르는 손매를 찍었지만 '쪼르르' 찻물 구르는 소리에 괜스레 귀밑이 부끄럽다.

나는 여행에서 스님들을 만나면 이것저것 꼬치고치 캐묻는다. 그동안 수행한 것들을 공짜로 좀 나눠주라는 협박인 셈이다. 오늘은 나도 별로 즐겨하지 않는 정치이야기가 화두가 됐다."

- 요즘 뉴스 보시면 어떤 생각이 드나?
"뉴스를 보려면 대단한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스포츠를 본다. 특히 야구를 좋아 하는데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기 때문이다. 가끔 불상사가 일긴 하지만 어디 국회만 하겠는가? "

- 재신임에 특검까지 나라가 시끄러운데?
"'마음은 원숭이 같으니 먼저 마음을 다스리라고 했다' 세상을 다스리기 전에 본인들 마음부터 다스리는 게 어떨까 싶다.

세치 혀로 하늘을 가리려는 사람들이 정치인들이다. 속으로는 욕심보를 하나씩 감추고 겉으로만 점잖은 사람들이다. 속으로 똥이 가득 찬 사람들이 향기 난 말을 한다고 악취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어떤 사람들이 정치를 해야 할까요?
"자기 직업과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 서비스 차원에서 정치를 해야지 정치로 먹고사는 건달들이 해서는 안 된다. 음식은 저마다 재료가 달라도 다 조화를 이뤄 맛을 내는데 정치인들은 습성이 다르면 조화를 내기 힘든 것 같아서 안타깝다."

-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민족대표 33인중 유일하게 변절하지 않은 만해 선생이 오늘날까지 추앙 받는 이유는 살다 가신 궤적에 향기가 배어 있기 때문이다. 말과 외모는 눈을 감으면 찰나처럼 사라지지만 매력 있는 사람의 향기가 영원히 남기 마련이다. 머문 자리에 항상 향기가 남는 매력 있는 사람, 원력보살(願力菩薩)이 되기 바란다."

- 요즘 종교 어떻게 생각하세요?
"남을 생각하기 보다 너무 기복적인데 집착하는 것 같고 종교는 자꾸 기업화 되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부처님은 밥은 빌어먹고 잠은 길에서 자고 평생 절을 가지지 않았다. 외형을 늘리는 것보다 소박함 속에서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깨끗이 하는데 정진했으면 한다."

- 경제가 어려워 요즘 젊은이들이 걱정이 많은데?
"세계를 지배한 나폴레옹도 3번 전쟁하면 겨우 한번 이겼을 뿐이다. 야구로 따지면 3할인 셈인데 타자가 3할이 넘으면 강타자로 분류한다. 3번 도전해서 한번 성공하면 성공한 인생이라는 이야기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기회의 신'은 뒷머리가 없어서 머리채를 휘어잡을 수 없으므로 도전하는 과정에서 세상을 사는 지혜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 /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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