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와 MBC, EBS 등 3개 방송사 시청자위원회는 지난 11월 25일 한나라당이 국회에 제출한 수신료 분리 징수를 위한 방송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시청자위원회는 시청자를 대표하여 방송(사)에 대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법정기구이다. 당연히 뉴스나 프로그램뿐 아니라 방송구조 등 방송현안 등에 대해 입장을 밝히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SBS 시청자위원회가 빠졌다는 사실이다. 왜 빠졌을까? SBS 시청자위원회는 수신료를 분리 징수하자는 한나라당 주장에 찬성하기 때문인가?
SBS 시청자위원회 위원장인 유재천 한림대 교수는 KBS 임헌영 시청자위원장으로부터 참여 권유를 받았다. 이에 대해 유 위원장은 민영방송이 참여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거부했다고 한다. 여기서 유 위원장의 견해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유 위원장은 11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수신료 문제에 대해 기고한 바 있다. 제목은 <공영 KBS가 사는 길>이었다. 이 글을 보면 유 위원장은 수신료의 분리 징수가 가져올 파장에 대해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신료 수입의 현격한 감소로 KBS의 재정이 취약해져 1TV도 광고를 하게 돼 광고의존도가 높아짐으로써 공영성을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유 위원장은 그 해결책을 KBS의 독립성과 공정성 회복에 두고 있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사실상 한나라당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한나라당에 대해서도 “빈대가 밉다고 공영방송이라는 초가삼간을 태워버리는 잘못은 없어야 할 것”이라며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할 수 있는 근본대책을 심도 있게 연구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원려(遠慮)가 필요하다”고 주문했지만, 이는 단지 글을 형식적 균형으로 포장하기 위한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유 위원장은 공영방송이 독립성과 공정성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정치세력, 압력단체 및 광고주나 노동조합과 같은 특정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만 한다”면서 “노무현 정부 하의 KBS가 탈정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켜왔다고 말할 수 있는지를 KBS 구성원들은 진솔하게 반성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수신료 분리징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는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유 위원장에게 한나라당은 정치세력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한나라당의 정치공세에 대해서도 ‘특정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영향력’으로 비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니 “한나라당이 총선을 앞두고 방송을 길들이려는 당파적 이해 때문이라거나 KBS를 상업방송화 하려는 음모, 또는 수구반동세력의 ‘KBS 죽이기’라고 몰고 갈 일만은 아니다”고 대범함과 너그러움을 과시할 수 있는 것이리라.
유 위원장 주장의 모순은 이런 것이다. 중장기적인 과제와 당장의 현안을 섞어버림으로써 ‘KBS 죽이기’에 일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로 현재까지 KBS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의심할만한 심각한 문제는 없다. 다만 공영방송으로서의 독립성을 확실하게 뿌리내리게 할 제도적 장치의 마련은 필요하다.
문제는 국회 과반의 다수당인 한나라당이 대책 없이 일을 저질러버리는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당장의 현안이다. ‘원려’니 어쩌니 하는 레토릭은 한가한 놀음이다.
따라서 SBS 시청자위원회도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해야 마땅하다. 수신료 분리 징수는 KBS 뿐 아니라 전체 방송의 재앙으로 다가올 것이며, 당연히 시청자들에게도 재앙이 된다.
유 위원장도 “수신료 분리징수가 한번 결정되면 다시 통합징수로 돌아가기는 매우 힘들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한가하게 한나라당의 ‘원려’만을 촉구해서야 되겠는가? 당장에 수습해야 할 시급한 현안이 있고, 장기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있는 것이다.
이번 수신료 파동은 KBS나 EBS(수신료의 3% 배정)만의 문제가 아니다. 직접적 관련이 없는 MBC 시청자위원회가 동참한 까닭도 그 때문이다. SBS가 민영방송이라고 해서 빠질 이유가 없다.
유재천 위원장은 SBS 시청자위원들의 의사도 묻지 않고 혼자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창남 성공회대 교수, 주창윤 서울여대 교수,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등 위원들이 위원장의 이런 독단에 대해 월례 회의에서 따지려 했으나 유 위원장이 불참해 무산됐다고 한다. 적어도 절차의 비민주성에 대해서는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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