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린이 잡지를 꿈꾸는 책 둘

[책읽기가 즐겁다 44] <고래가 그랬어>와 <어린이문학>

등록 2003.12.03 11:37수정 2003.12.03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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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속알맹이 알뜰한 어린이 잡지 없나요?

우리 나라에도 잡지는 많습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엮는 잡지도 많아요. 다만 어린이가 손수 찾아서 보거나 사서 볼 만한 잡지는 드물어요. 어린이를 키우는 부모나 교사가 볼 만한 잡지도 드물고요. 따로 부모나 교사가 아니더라도 깊은 문학성과 감동을 얻고자 찾아볼 만한 잡지도 드뭅니다.


좋은 어린이 잡지라면 어린이든 어른이든 즐겁게 찾아서 보는 한편으로 문학성과 감동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잡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잡지를 만들고자 애쓰는 마음과 열매로 나온 잡지 속알맹이가 알뜰한 책을 만나지 못하는 게 우리 형편이에요.

<2>제대로 된 글이 담긴 어린이 잡지

오래된 어린이 잡지 가운데 어느 것은 한글로만 쓰다가 한자를 가득 넣어서 쓰는 엮음새로 탈바꿈하기도 했고, 가로쓰기에서 세로쓰기로 바뀌기도 했어요. 어느 잡지는 '어린이' 잡지라고는 하지만 '어린이'가 찾아서 볼 만한 성격이 못 되어요.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보는 게 보통 우리들이 만날 수 있는 어린이 잡지예요.

그런데 어린이를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그 잡지에서 다루거나 쓰는 말과 글을 살피면 어린이를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는 느낌도 짙답니다. 어린이 삶과 동떨어지거나 어린이들에게 너무 어렵거나, 어른들끼리도 쓰지 않아야 좋을 말을 아주 쉽게 쓰거든요. 때로는 어른 문학 비평을 한다며 들여온 어설픈 '번역투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어린이문학 비평에 쓰는 모습까지 봅니다.

다행이라면 뜻있는 분들이 애써서 어린이 스스로 찾아서 볼 만한 잡지를 엮으려고 애써왔으며 그런 열매가 앞으로는 차츰차츰 늘어나리라고 믿을 수 있다는 것. 김규항씨가 지난달부터 펴내는 어린이 만화잡지 <고래가 그랬어>가 좋은 뜻과 생각으로 첫선을 보였습니다. 다가오는 2004년에 (정식 잡지로는) '일곱 해째' 펴내게 되는 <어린이문학>이라는 잡지도 또 다른 빛입니다.


a <고래가 그랬어> 12월호 겉그림입니다.

<고래가 그랬어> 12월호 겉그림입니다. ⓒ 야간비행

<고래가 그랬어>는 값이 좀 비싸고 만화 주제가 조금 무겁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어요. 하지만 중요한 건 주제가 '가볍다, 무겁다'를 넘어서 어린이가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을 살포시 담아내며 어린이 스스로 자기 생각을 이끌어내도록 도울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어린이가 학교와 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어린이 스스로 살아가는 마을과 사회와 나라와 세계와 우리 자연까지도 너르고 깊은 마음으로 살필 수 있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일을 하면 더 좋아요. 어린이에게 가장 중요한 건 학교 공부나 시험 성적이 아니거든요. 어린이답게 클 수 있는 마음밭과 생각입니다. 어릴 적부터 일과 놀이를 하나로 어우르며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자라고 살아가는 마음밭과 생각이거든요.


<고래가 그랬어> 1호를 보았을 때 꽤 애쓰고 정성을 들였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아직은 몰라요. 이제 겨우 '2호'째를 냈는 걸요. 좀 더 지켜보아야겠어요. 앞으로도 꾸준하게 좋은 모습으로 이어가면 좋겠고, 제자리에서 머무는 잡지가 아니라 호를 거듭할수록 잡지 알맹이도 거듭나서 우리들에게 즐거움을 듬뿍 선사하는 잡지로 우리 곁에 있으면 좋겠어요.

<3>돈 때문에 어린이책을 만든다고?

책방에서 새로 나온 좋은 책이 있는가 살피다가 12월호로 62권째 나온 <어린이문학>이라는 잡지를 보았습니다. <어린이문학>이라는 잡지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든 잡지 가운데 하나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어린이문학>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아보았습니다.

<어린이문학>이라는 잡지를 펴내고자 모임을 만들었던 때는 1988년. 그때는 '배달어린이문학운동협의회'라는 이름으로 태어나요(지금은 모임 이름이 '한국 어린이문학 협의회'입니다).

'배달 어린이문학 운동 협의회'는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과 권정생 선생님 두 분 뜻을 모아서 나온 잡지예요. 두 분 뜻에 권오삼, 노경실, 박종호, 송현, 이현주, 이하얀언더기, 윤기현, 조월례 이렇게 여덟 사람이 더 모여 첫 발기인으로 문을 엽니다. 모임을 처음 열면서 내놓았던 '발기 취지문'을 찾아서 읽어 봅니다.

…책을 만드는 분들이 아이들의 책을 보기 좋게만 만들어 그 밑천을 성급히 거두어 보려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고 진정 아이들과 겨레의 앞날을 멀리 내다보아 이바지하는 마음으로 투자할 것을 권한다…<이오덕 씀>

a <어린이문학> 2003년 12월호 겉그림입니다.

<어린이문학> 2003년 12월호 겉그림입니다. ⓒ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요즘도 그렇지만 어린이책을 만드는 많은 출판사들은 "어린이책이 돈이 되기 때문"에 해요. 책방에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번역 동화'와 '번역 그림책'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거든요(창작 동화와 창작 그림책도 비슷합니다). 거의 모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책들이 '서툰 번역'으로 '아주 짧은 동안'에 펴내요. 그러면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아이들 삶과 생각과는 동떨어지면서도 서양 것을 우러르고, 말장난과 말재미에만 이끌립니다.

…우리는 오늘날 아이들이 학교에서 사람답지 못한 점수 쟁탈 공부에 찌들려 병들고 있는 현실에 특히 주목한다. 아이들을 풀어놓아 주기 위해 글을 쓰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는 책을 읽힐 뿐 아니라, 아이들을 살리기 위한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적극 참여한다…<이오덕 씀>

이 대목이 참 중요해요. '아이들을 풀어 놓을' 수 있는 어린이문학이어야겠고, 학교 교육이어야하거든요. '점수 쟁탈 공부'가 아니라 '어린이 자기 자신과 이웃과 우리 삶과 자연과 사회'를 고루 살피며 커 갈 수 있는 공부여야 좋잖아요. 아이들에게 읽힐 글이라면 '어른이 보기에 좋은 글'이 아니라 '아이가 보기에 좋으면서 어른이 보아도 함께 좋은 글'이어야 참 좋습니다. 하지만 아이들 손에 쥐어 주는 책을 살피면 엉뚱한 말장난과 어설픈 이야기에다가 우리 삶과 동떨어진 어렵고 우리 문화와도 어긋난 낱말이 가득하기 일쑤예요.

<4>어린이에게 좋은 글

돌아가신 이오덕 선생님은 잡지 <어린이문학> 말고도 퍽 많은 어린이잡지를 만들고 엮으셨어요. 이오덕 선생님이 그동안 엮거나 만든 어린이잡지 발자취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살아 있는 아동문학,인간사(1983)>
<겨레와 어린이,풀빛(1986)>
<이 땅의 어린이문학 (1) 지붕 없는 가게,지식산업사(1985)>
<이 땅의 어린이문학 (2) 우리 모두 손잡고,지식산업사(1987)>
<아이들 나라 (1),지식산업사(1988)>
<아이들 나라 (2),지식산업사(1989)>
<한국의 동화문학,친구(1990)>
<우리 어린이 문학,지신산업사(1993)>


이밖에도 다른 글모음이 많아요. 그리고 이오덕 선생님은 1983년에 벌써 '한국 글쓰기 교육 연구회'라는 모임을 열어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펴내서 여러 교사들과 나누곤 했습니다. 그러니 오랜 교직 경험과 아이들과 부대낀 삶을 바탕으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에게 살가운 좋은 잡지를 만들고자 바라던 꿈이 있던 셈이에요. 그 꿈이 여러 부정기간행물로 꽃피었는데, 마지막으로 <어린이문학,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으로 열매를 맺었지 싶습니다.

'어린이들이 스스로 사서 볼 만한 잡지'는 아닌 <어린이문학>이에요. 하지만 '어린이가 읽으면 좋을 책'을 살피고 어린이 삶과 문화를 헤아리는 이야기를 담은 어린이 잡지 <어린이문학>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문학>이라는 잡지가 '끝'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제야말로 한복판에 섰다고 할까요? 이제 비로소 걸음마를 떼었다고 할까요.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 삶, 그러니까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소금도 되는 살가운 잡지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또한, 즐거운 마음과 신나는 마음을 함께 느끼며 나눌 수 있는 푸진 감동을 담은 잡지로, 삶을 담아내며 삶을 살찌울 수 있는 잡지로 나아가야 좋겠다고도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린이문학> 2003년 12월호 머리말에 있는 말 한마디를 옮기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작가는 평론가를 보고 글을 쓰면 안 됩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는 사람은 어린이를 보고 글을 써야 합니다. 글을 쓰기 전에 확고한 아동관과 문학관을 가지고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강한 작가정신을 먼저 길러야 합니다. 작가정신은 남이 불어넣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문학> 2003년 12월호 머리말

고래가 그랬어 184호

고래가그랬어 편집부 지음,
고래가그랬어,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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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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