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3이 되는 딸에게

등록 2003.12.03 15:22수정 2003.12.0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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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보기 쉽지 않은 우리 딸에게.

드디어 고3이 되는구나. 어제는 수능시험 성적표가 나왔고, 그것을 받아든 올 고3생들의 표정이 텔레비전 화면으로 비치던데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그것이 바로 일년 후의 너의 모습일 것이고, 그 중에서도 '어이쿠' 하며 주저앉는 한 여학생의 모습은 내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다.

더 큰 일은 없어야 할 텐데 걱정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에 인테넷 신문에 뜬 '고3 투신, 중태'라는 기사를 접하면서 내려앉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한동안 서성거려야만 했다. 이 일을 어찌해야만 하느냐? 어떻게 하면 생떼 같은 너희들의 끝간데 모르는 절망을 막아줄 수 있겠느냐?

먼저 정말 미안하구나. 우리들이 제도와 사회적 분위기를 제대로 마련해 놓지 못한 채, 너희들을 좁은 경쟁의 대롱 속에 넣어 고 그 중의 극히 소수만이 오를 수 있는 허망한 '일류대의 꿈'으로 몰아와서,정말 미안하고 할 말이 없다. 특히 그 중에서도 오직 수능을 잘 보아야만 네 앞길이 열리고 보장되는 것이라고 주문처럼 외워온 이 부모들의 무능과 아집을 용서하거라.

그래도 한편으로는 오늘 새벽 덜 깬 얼굴과 축 쳐진 어깨를 뒤로 하고 학교로 향하는 너를 보면서 차마 입으로는 하지 못했지만 속으로는 '힘들겠지만 열심히 공부하고 오너라. 다른 방법이 없지 않겠니'라고 외친 이 애비의 심정도 헤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간절하다. 동시에 당장은 어쩌지 못하더라도 너의 동생이 고3이 될 때는 지금보다는 나아진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나에게도 스스로 다짐해 본다.

우선 경쟁의 칼날을 무디게 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세상이 아니라, 동등한 기회를 갖고 공정하게 경쟁해서 이긴 자에게는 일정한 보상을 하되 탈락자에게도 지속적인 기회를 보장하는 그런 사회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들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지위 때문에 아예 경쟁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우리 공동체가 책임지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 사회를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들이 요구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역시 대학 입학 경쟁의 공정성 확보일 것이다. 먼저 어떤 대학을 나왔느냐가 아니라, 어떤 공부를 했는가를 중요한 채용 기준으로 잡도록 강제하는 장치를 마련해야 하고 그동안 차별 대우를 받아온 사람들에게는 일정한 혜택을 보장해주어 최소한 동일한 출발선상에 설 수 있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절차들이 어느 정도 갖추어진 후에는 그 결과를 흔쾌히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갖추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의 평등이 능력과 노력의 평균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해도 여전히 마음은 어둡고 답답하구나. 너에게 그런 얘기들이 얼마나 실감나게 들릴 지도 의문이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듣기에는 좋은 얘기라고 해도 실제로 현실화 될 가능성이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구나.

그래도 우선 방향은 그렇게 잡고 우리들이 지금 이 시점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나씩 실천해 가는 방법 밖에는 없을 듯 하다. 우선 수능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신중하게 연구해서 실천에 옮기고, 더 나아가 고등학교 과정만 큰 무리없이 이수하면 대학에 갈 수 있는 제도를 강화하고 그래도 경쟁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경우에는 최대한 공정하게 경쟁하는 절차의 공정성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해나가야 할 것이다.

아직 고2지만 실제로는 고3이 되어버린 너에게서 우리 교육의 모순 덩어리를 본다. 수능은 수능대로 난리이고, 과외를 비롯한 사교육 시장 이야기도 흉흉한 이 거리의 모퉁이에 서서 간절한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외치고 싶다. 그래도 제발 죽을 생각만은 하지 말아 달라고, 우리 어른들을 용서하고 그래도 함께 살아가면서 새로운 앞날을 기약해 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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