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와 절제를 갖춘 에스프레소 이야기

에스프레소, 그 거부할 수 없는 마력에 끌리다

등록 2003.12.05 13:14수정 2003.12.05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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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맛보는 일의 연속이다. 때로는 쌉싸름한 슬픔을 맛보고 때로는 지독하게 씁쓸한 환멸, 그 뒤끝에 찾아오는 달콤하지만 짧은 기쁨을 만끽하기도 하며, 간고한 시련이 가져다주는 매운 맛을 음미하기도 하며 좌절과 포기라는 시디신 맛에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한다. 전에 내가 알던 시인은 '만난다'는 말을 '맛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듯 생이란 오미(五味)로 이루어진 오묘한 맛의 음식인 셈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시는 기호 음료 가운데에도 씁쓸하면서도 묘한 향기를 지니고 있는 음료가 있다. 커피라는 음료가 바로 그것이다. 어느 책이었던지 기억나지 않지만 브라질에선 커피를 '악마의 미소'라고 한다고 한다. 몸에 나쁘다느니, 수면장애를 가져다준다느니 여러 가지 얘기가 많지만 커피라는 악마가 던지는 유혹적이고, 자극적인 미소에 기꺼이 끌려가는 커피 매니아들 또한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있어 그렇게 대중화되고 일상화된 커피라는 기호 음료를 제대로 알고 마시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커피의 종류 또한 브랜드 커피 ,맥심 커피, 초이스 커피, 헤이즐넛 커피 등등 열거하기조차 버거울 정도다. 크림이 우유의 정수이듯 그 수많은 커피 종류 가운데도 에스프레소는 단연 커피의 황제라 칭할 만 한 것이다.

어떤 이는 커피면 다 거기서, 거기지 특별할 게 뭐 있느냐고 말이다. 얼핏 보면 그는 상당히 대범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나 삶을 즐긴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차이를 즐기는 것이다. 차이라는 말을 바꿔 말한다면 질(質)이라는 말이 될 것이다.

또한 애써 마시지 않아도 생을 영위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는 식품이 기호식품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기호식품이란 (영양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향기나 맛이나 자극을 즐기기 위한 것이다. 자기가 즐기는 기호식품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 지식이라도 갖춘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깊고 맛있게 그 식품의 맛을 음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사진 이유경)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사진 이유경)안병기
내가 맨 처음 에스프레소를 마셔본 것은 자하문 근처의 한 카페에서였다. 지인(知人)을 따라 엉겁결에 시킨 에스프레소 커피를 보는 순간 난 당황했다. 종재기만한 작은 잔에 담긴 까만 액체는 마치 오래 전 할아버지의 담뱃대에서나 보았던 끈적끈적한 담뱃진을 연상시켰을 뿐 아니라 본래 질보다는 양을 선호하는 촌사람에겐 터무니없이 작은 양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작은 양을 차마 보통 커피 마시듯 후루룩 마실 수가 없어서 자연스레 애들 사탕 빨듯 조금씩 조금씩 음미할 수밖에 없었다. 커피의 맛은 매우 진하고 독한 쓴 맛이었다. 그러나 그 쓴 맛을 삼키고 나자 비로소 혀 끝에서부터 그윽한 향기가 꾸역꾸역 살아 나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도 에스프레소를 즐기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게 되었다.

<에스프레소의 마력> 책 표지
<에스프레소의 마력> 책 표지안병기
<에스프레소의 마력(바움 출판사)>이라는 책은 커피의 정수라 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에스프레소 커피에 대한 모든 것을 담고있는 책이다. 동양철학을 전공한 저자 서준원씨는 그가 왜 에스프레소 커피라는 '사소한 '것에 매달려야 했는지를 이렇게 들려준다.


"폐쇄적 자세를 가진 자는 붕새가 될 기회를 잃고 산비들기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 바깥 세상 사람들이 붕새가 되든 참새로 남아있든지 애석해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내가 붕새가 되는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불행히도 그가 순례했던 에스프레소 전문 카페들은 대부분 에스프레소가 아닌 커피를 에스프레소라고 팔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인들은 손님이 들지 않는 것을 걱정할 뿐이지 그들의 커피 맛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이에 대해 저자는 "산비들기가 내놓는 상상 속의 세상 남쪽 끝 연못의 물맛이 아니라 붕새가 만들어 주는 물맛이어야 한다"라고 일갈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의 맛을 찾아 헤매다가 실망한 저자가 이렇게 만들어져야 제대로 된 에스프레소라는 걸 대중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쓰여진 셈이다. 책은 에스프레소의 탄생에서부터 원두와 배전, 에스프레소 머신, 추출법에 이르기까지 에스프레소의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매우 친절하게도 에스프레소 잔을 어떻게 잡고 마셔야 운치 있는지 까지 일러준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에스프레소 한 잔을 대접하라고 권유한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가장 아름답고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그 사람과 나누어야 함이다."라고.

"인생의 에센스를 즐기는 연습이 필요하다"
저자 서준원과의 서면 인터뷰

- 동양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커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놀랍고, 또 그것을 책으로 낼 생각을 하셨다는 것이 놀라운데, 그 동기는 무엇입니까?
"우선 제가 쓴 책은 커피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에스프레소만 다루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전문적 지식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입수하거나 알고 있는 지식을 권위 있는 책을 확인해 가면서 원고작성에 사용하였습니다.

책에서도 드러나 있지만, 에스프레소는 커피의 정수입니다. 철학은 인생의 정수를 추구합니다. 무엇이 가장 바람직하고 인간본질에 가까운 삶인가를 연구하는 것이지요.

외래문화가 양적인 팽창을 거듭하는 현재의 환경 속에서, 질적인 부분을 부각시켜, 에스프레소를 통해 진정으로 향유되어야 할 인생의 에센스를 즐기는 연습을 하자는 것입니다. 에스프레소라는 커피의 진수를 느끼게 되면, 음식도, 음악도, 인간관계도 그리고 개별 인간의 존재적 완성도 정수를 향한 질적 향상으로 되어가지 않을까요?"

- 목차가 매우 특이하게 느껴지는데 목차는 어떤 의도로 구성하신겁니까?
"우선 목차를 선정하는데 커피가 가지고 있는 악마적 느낌을 친근함으로 바꾸기 위해 기독교에서 칠죄종이라 일컫는 일곱가지 죄악을 목차의 모티브로 사용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것들은 책 속에서 부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연민을 느끼게 하기도 하는 모습으로 연출되는데, 여기에는 많은 윤리적학적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논의는 제가 말하는 것 보다 독자들의 몫으로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한 가지만 말한다면 여기에 소개된 개별죄악이 상징적으로 묘사된 사람들은 죄인일수도 죄인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 에필로그에서 언급하신 에스프레소를 통한 글로벌화라는 화두가 재미있게 느껴지는데, 영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하신 분으로서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계신것 같습니다. 오마이뉴스의 독자들을 위해 요지를 다시 설명해 주신다면?
"글로벌화는 사실 요사이의 새로운 담론인것 같지만 현상적으로 글로벌화는 항상있어왔습니다. 과거 한국은 중국과 일본과 같은 지리적으로 접근가능한 나라들과 문화가 섞여있었던 것이죠.

작금의 현실은 외국을 알고자하면서도 항상 한편으로 한국적인 것이 가장 우수하다는 이데올로기가 깔려있습니다. 이것을 부정하고자 하지는 않지만, 이것이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은 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가리는 것이지요.

글로벌화에는 '주장'보다는 '이해'가, '경쟁'보다는 '공존'의 의미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한국 밖에는 수많은 나라와 민족의 문화적 정수들이 에스프레소 말고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즐길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종족의 우상으로부터 조금 객관화 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 안병기 기자

에스프레소의 달콤함을 표현내고 싶어
사진 작가 이유경과의 서면 인터뷰

- 이번 <에스프레소의 마력> 책 사진 작업에 참여하시게 된 동기는 ?
"누구나 좋아한다고 하고, 느낀다고 하고, 안다고 생각되는 에스프레소가 사실은 그렇게 쉽게 대중적이지 못하다는데 생각이 미친 어느 날 에스프레소를 함께 마시다 둘이 의기투합을 하게 된셈이지요.

그리고 제가 원래 좀 맛이나 향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취향이긴 하지만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는 편인데 누군가 그러더군요, 에스프레소의 느낌이란 것이 독처럼 쓰다. 지옥처럼 까맣다. 그러나 그대의 사랑처럼 달콤하다라구요...해서 진짜 그 느낌을 사진으로 표현해내보고 싶다는 열망이 늘 가슴 한켠에 있었는데 우연히 그렇지만 필연처럼 너무나 일상적이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생활 속에서 일탈을 꿈꾸듯이 에스프레소의 마력 속에 빠져버리고 만 거죠."

- 사진의 색채가 매우 아늑하고 따스해 보입니다.커피에 대한 특별한 추억이라도 있으신지요?
"제게 있어 커피란 가족의 화기애애함으로 시작되는데 아마도 중학교 1학년이던 1968년으로 기억되네요. 대학생이던 언니들과 멋쟁이 아버지의 긴 이야기 속에 넘실거리던 진한 향기에 취해 슬쩍 커피잔을 빼돌린 순간부터인 거죠.

그때 이미 나의 미각은 커피라는 달콤쌉싸르함에 감전사해버린 셈이라고나 할까요? 암튼 그렇게 제게로 다가온 커피는 그날 이후 늘 함께 하고 있는 셈이지요." / 안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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