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통해 도를 깨닫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신문사)

등록 2003.12.07 13:20수정 2003.12.07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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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소설은 가볍고 경쾌하다. 야구라는 소재만이 아니라 글을 풀어 가는 방식이나 문투 역시 그러하다. 그런데 가볍고 경쾌하다 해서 무게나 깊이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천박한 선입견일 수 있다. 우리는 그의 글에서 '도'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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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 한겨레

프로야구가 처음 등장했던 1982년, 12살의 주인공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연고지였던 인천에서 야구를 통해 삶을 꿈꾼다. 그러나 '국가대표 출신' 한 명 없던 삼미 슈퍼스타즈가 연패의 늪에 빠지고 꼴찌의 대기록을 수립하자 그 꿈은 산산이 부서진다. 주인공은 야구의 패배를 교훈 삼아 승리하는 삶을 살리라 마음먹는다.


"평범한 야구 팀 삼미의 가장 큰 실수는 프로의 세계에 뛰어든 것이었다. 고교야구나 아마야구에 있었더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팀이 프로야구라는­실로 냉엄하고, 강자만이 살아남고,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하며, 물론 정식 명칭은 '프로페셔널'인 세계에 무턱대고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평범한 인생을 산다면, 그것이 비록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한 인생이라 해도 프로의 세계에서는 수치스럽고 치욕적인 삶이 될 것이라 나는 생각했다."(126쪽)

프로야구의 등장과 함께 현실은 '프로'의 장으로 변한다. 가슴팍에 S자를 붙인 슈퍼맨들이 사회를 지배하고 평범한 '아마추어'들은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약한 존재'로 전락한다. 주사위 굴리기라는 기연(奇緣)으로 S대에 입학한 주인공은 그 S자의 힘을 빌어 일류 직장을 다니지만 IMF라는 한파(슈퍼맨도 비켜갈 수 없는 난관!)를 겪으며 정리해고 당하고 실의에 빠진다.

바로 그때 삼미 슈퍼스타즈의 어린이팬클럽 시절을 함께 했던 친구가 '제국의 실체'를 깨우쳐 준다.

"미국의 주력 산업은 자본주의의 프랜차이즈야. 프랜차이즈! 알겠어? 그 일환으로, 또 마침 82년은 수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해이기도 해서 놀란스와 프로야구가 함께 거래된 것이겠지. 물론 처음엔 <섹스>와 <프로>를 함께 수입하라는 조언을 들었겠지? 물론 <섹스>는 양념이니까. 즉 <프로>를 더 잘 배양하기 위한­유산균 발효유로 치자면 올리고당과 같은 존재였지.

그런데 문제가 생긴 거야. 무슨 문제? 당시의 한국인들은 <프로>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고, <섹스>라는 말은 차마 부끄러워서 입에 올리지도 못했거든. 그래서 놀란스와 프로야구가 건너온 거야. 선발대의 역할을 한 것이지. 놀란스가 와서 [섹시 뮤직]을 부르고, 프로야구가 <프로>의 전파를 담당하기로!"(244쪽)



오, 놀라운 자본의 전략이여!(작가의 상상력보단 놀라운 기억력, 혹시 모를 검색력, 자료수집능력에 찬사를 보낸다.)

친구는 섹스와 프로로 치장한 '자본주의의 합리성'에 가장 격렬히 저항한 사람들이, 해체를 무릅쓰고 저항한 팀이 바로 삼미 슈퍼스타즈였다는 '비밀'을 알려 준다. 이제 삼미 슈퍼스타즈는 자본주의에 감염되지 않는 삶의 정신, 외부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노동을 자아실현의 도구로 삼는 격렬한 저항의 정신을 상징한다.


"그건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야. 그것이 바로 삼미가 완성한 <자신의 야구>지. 우승을 목표로 한 다름 팀들로선 절대 완성할 수 없는­끊임없고 부단한 <야구를 통한 자기 수양>의 결과야. 뭐야, 너무 쉽잖아? 틀렸어! 그건 그래서 가장 힘든 <야구>야. 이 <프로의 세계>에서 가장 하기 힘든 <야구>인 것이지. 왜? 이 세계는 언제나 선수들을 유혹하고 있기 때문이야. 어이, 잘 하는데. 조금만 더 하면 될 거 같은데? 누군 이번에 어떤 팀으로 옮겨갔대. 연봉이 얼마래. 열심히 해. 넌 연봉이 얼마지? 아냐, 넌 할 수 있어."(251쪽)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을 꿰뚫은 주인공과 친구는 주변 사람들을 모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창단하고 자기만의 '리듬'을 가진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 삶은 "더 이상 치기 힘든 공을 치거나, 잡기 힘든 공을 잡기 위해 똥줄을 태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론은 다들 잘 먹고 잘 산다, 다."(295쪽).

지은이 소개

박민규: 어릴 때부터 학교 가기가 싫었다. 커서도 학교 가기가 싫었다. 커닝을 해 대학에 붙긴 했지만 여전히 학교 가기가 싫었다.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먹고살기가 문학보다 백 배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회사 가기가 좋을 리 없었다. 해운회사, 광고회사, 잡지사 등 여러 직장을 전전했다.

8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불현듯,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직장 생활을 접고 글쓰기를 시작했다. 꼴에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쉬엄쉬엄 밴드 연습도 하며, 밥 먹고 글 쓰고 놀며 나무늘보처럼 지내고 있다. 누가 물으면, 창작에 전념한다고 얘기한다. "말로는 뭘 못해"라고 모두를 방심시킨 후, 정말이지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박민규의 저항방식은 이 세계에 결연히 맞서는 게 아니라 슬쩍 지나쳐 가는 것이고 이 세계의 논리로부터 '도주'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 "세계는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구성해 나가는 것"(242쪽)이다. 현실에 남겨진 구멍을 찾아 그 속에 보금자리를 틀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건 작가의 실제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요즘 팬클럽은 무조건 추종하지 않는다. 비판할 줄 아는 팬클럽이 '진정한 팬클럽'이다. 그런 점에서 박민규는 '따라잡기'에 열중하는 과거의 팬클럽에 머물고 있다. 그가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삶의 지표인 삼미 슈퍼스타즈가 '신화'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팀 해체, 혹은 매각 이후 선수들의 삶을 다룰 '용기'나 '여유'가 없다. 왜 삼미 슈퍼스타즈의 선수들은 높은 도력(道力)을 가졌음에도 무기력하게 현실에서 사라져야 했을까, 그들은 야구장이 아닌 사회라는 또 다른 장(場)에서 자신들의 싸움을 계속할 순 없었을까, 라는 의문은 뒤로 남겨진다.

이 남은 의문은 도를 깨우치나 그 도에 매몰되지 않을 것을, '개인의 깨달음'이 아니라 '사회의 깨달음'이길 원하는 목소리이다. 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현실 자체를 뒤흔드는 것, 그래서 우리에겐 '도주'가 아니라 '탈주'의 삶이 필요하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개정판

박민규 지음,
한겨레출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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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고 싶어서 가입을 했습니다. 인터넷 한겨레 하니리포터에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기자라는 거창한(?) 호칭은 싫어합니다. 책읽기를 좋아하는지라 주로 책동네에 글을 쓰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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