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광산 사무실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 이 땅속으로 30도 기울기로 지하 1800m까지 갱도가 연결돼 있다.김명숙
구봉광산은 우리나라 최대 금광이었다. 일제시대 때 개발된 금광이지만 그때는 지상에 있던 광석만 발굴하다가 대동아전쟁 이후 그만두었다. 그러던 것을 대명광업주식회사가 재개발 해 지하까지 금광을 파게 된 것이다.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도 컸지만 구봉광산에서 그 당시 우리나라 전체 금 생산량의 60%를 담당했다. 폐광되기 전에도 한달 60Kg을 생산했을 정도였으며 금 한 돈 3.75g이 그때 돈 3200원이었다. 금 한 돈 값으로 인부 10명을 썼을 정도였다. 구봉광산에 근무하는 사람들만 해도 1천여명이 이르고 그 가족까지 하면 3천명이 넘었다.
대명광업 대표 정명선씨는 구봉광산의 흥행으로 청양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기도 했으며 '밥 먹고 합시다'라는 국회 발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구봉광산은 1967년 양창선씨가 매몰됐다가 16일만에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구출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이 들어가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가운데 대명광업소를 처음 운영한 정명선씨의 아들들에게 사업권이 넘어가면서 중간관리자들의 부정으로 인해 회사 경영사정은 더욱 어려워졌고 근로자들에게 임금이 지불되지 못해 파업에 이르게 됐다.
그것을 빌미로 사업주는 폐광선언을 하면서 그날로 모든 채광이 중지되고 임을수옹의 금과 함께 구봉광산의 역사도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구봉광산의 최종 덕대 박예신옹과 임을수옹은 땅속에 두고온 금을 잊은 지 오래고 나머지 인생을 농사 지으며 열심히 살았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2003년도 세밑, 두 사람은 사라져가는 세월 속을 걸어 옛 구봉광산터에 섰다. 그곳에서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던 구봉광산에 대한 30여년전의 추억을 사라져 가는 세월 속에 함께 떠내 보냈다.
"땅속에 두고 온 금 때문에 속병을 많이 앓아 지금도 심장이 안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금을 다 캤다면 지금까지 못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오래 전에 잊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실업자가 많으면서도 어려운 일을 안하려고 한다는데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그것이 바탕이 되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광산 일을 했고 꿈 같은 일을 겪고도 농사 지으면서 잘 살았습니다. 새해에는 모두 열심히 일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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