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다지 150톤을 가슴에 묻은 사연

폐광된 금광 '구봉광산'의 마지막 덕대

등록 2003.12.31 16:31수정 2004.01.0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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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군 남양면 구룡리에 사는 박예신(79)옹과 임을수(75)옹은 우리나라 최대 금광이었던 구봉광산의 마지막 '덕대'다.

덕대는 금광회사로부터 광맥의 일부 구역을 측량해서 채광허가를 받아 금을 캐낸 다음 수확량의 일정부분을 금광회사에 내놓은 중간사업자다.

두 사람은 구봉광산을 운영하던 대명광업주식회사가 폐광선언을 할 때까지 금을 캐내던 사람으로, 엄청난 금맥이 고스란히 묻혀버리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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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대 금광이었던 구봉광산의 가장 마지막 덕대였던 박예신(왼쪽)옹과 임을수옹이 구봉광산 사무실이 있던 자리에 섰다. 박옹은 평생 이길을 오고 간 곳이라고 회상하고 임옹은 자신이 캤던 금이 저 깊은 곳에 있으나 다 잊었다고 추억했다. ⓒ 김명숙

"금맥이 합쳐지는 곳을 노다지라고 하는데 구봉광산에는 9호까지 금맥이 있어요.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금을 캐내던 지하 1720m에서 1800m 부근은 아홉개의 금맥이 모두 합쳐지는 곳이니 말 그대로 노다지지요. 지금도 금광을 찾아 들어간다면 찾아낼 수 있지만 30년도 넘은 일이라 다 옛 일이 돼버렸습니다."

두고 나온 금을 잊은 지도 오래 됐고 지금은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버렸다. 특히 임을수옹은 32년 전 자신이 캐놓은 금이 박힌 돌 150톤을 땅속에 고스란히 두고 나왔다. 임옹이 갖고 있는 광석매몰확인서가 그것을 증명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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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수옹이 갖고 있는 30년 된 광석매몰확인서. ⓒ 김명숙

"광석 매몰 확인서

임을수(당 42세)

매몰 광석량 150톤

상기 연고자인 임을수는 1971년 1월 20일부터 대명광업개발주식회사 구봉광업소의 분광업자이든 바 채굴작업을 계속 중 서기 1971년 4월 17일 대명광업개발주식회사 사장인 정정철이 예고없이 폐광선언을 함으로써 상기의 광석량이 항내(1천720m 및 1천540m) 조고에서 그대로 매몰되었음을 확인하나이다.

1971년 6월

채광주임 배00
채광감독 문00, 한00, 남00, 박00"


1971년 임옹은 지하 1720m 지점을 분광 받아 광석을 파내기 시작했는데 금맥폭이 160cm나 되었다. 180톤을 캐서 조고(휴도. 광산수로로 캐낸 광석을 권양기로 승강기 있는 곳까지 옮기던 길)를 거쳐 승강기 단계까지 옮겨 놓았다. 이제 승강기로 끌어올리기만 하면 지상으로 나오는 건데 그만 대명광업소측으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바람에 꺼내지 못하게 됐다.

이 소식을 들은 그 당시 노조지부장 이근하씨가 근로자들을 진정시켜 다시 꺼내기로 했으나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날 밤 예고없이 정전이 되어 모든 기계를 움직일 수 없게 되면서 물이 차 오르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이유로 대명광업소측도 폐업선고를 해 그대로 매몰되어 버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광석 매몰 확인서'를 받아 두기도 하고 두고 온 금 때문에 홧병이 나서 몸이 상하기도 했지만 얼마 뒤에 모든 기대를 버렸다.

임옹은 '광석 매몰 확인서' 외에 1971년 2~3월에 만든 '구봉광산 실측평면도'도 갖고 있다. 구봉광산 실측평면도를 보면 금맥을 따라 얼기설기 이어졌던 갱도가 표시되어 있어 구봉광산의 규모가 얼마였는지 짐작이 갈 정도다.

비록 임옹의 금은 땅속에 영영 묻혔지만 이 두 서류는 훗날 구봉광산과 청양의 역사를 기록하는데 귀중한 자료 역할을 할 것이다.

또 다른 최종 덕대 박옹 역시 눈앞에 노다지를 보고 나왔으나 광산의 폐광선언으로 이제는 가슴속에만 추억처럼 담겨 있다. 그 당시 1700m 아래에 얼마나 금이 많던지 그것을 봤던 사람들이 기절했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박옹은 16살 때 구봉광산에서 캐낸 광석을 분쇄해 금을 만드는 마광기 다루는 일부터 시작, 채광일도 하고 나중에는 덕대도 하면서 폐광될 때까지 광산일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구봉광산의 내력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남았다.

구봉광산이 얼마나 깊던지 "걸어서 청양에 갔다올래 갱도에 들어갈래, 하고 물으면 차라리 청양에 갔다오겠다"고 할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박옹은 금의 성분 분석을 잘 했다. 금을 이로 깨물어 확인하는 일을 하도 많이 해 지금은 그 흔적으로 이가 많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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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광산 사무실자리에 서 있는 두 사람. 이 땅속으로 30도 기울기로 지하 1800m까지 갱도가 연결돼 있다. ⓒ 김명숙

구봉광산은 우리나라 최대 금광이었다. 일제시대 때 개발된 금광이지만 그때는 지상에 있던 광석만 발굴하다가 대동아전쟁 이후 그만두었다. 그러던 것을 대명광업주식회사가 재개발 해 지하까지 금광을 파게 된 것이다.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도 컸지만 구봉광산에서 그 당시 우리나라 전체 금 생산량의 60%를 담당했다. 폐광되기 전에도 한달 60Kg을 생산했을 정도였으며 금 한 돈 3.75g이 그때 돈 3200원이었다. 금 한 돈 값으로 인부 10명을 썼을 정도였다. 구봉광산에 근무하는 사람들만 해도 1천여명이 이르고 그 가족까지 하면 3천명이 넘었다.

대명광업 대표 정명선씨는 구봉광산의 흥행으로 청양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당선되기도 했으며 '밥 먹고 합시다'라는 국회 발언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구봉광산은 1967년 양창선씨가 매몰됐다가 16일만에 전국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구출되는 과정에서 많은 돈이 들어가 경영이 어려워지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가운데 대명광업소를 처음 운영한 정명선씨의 아들들에게 사업권이 넘어가면서 중간관리자들의 부정으로 인해 회사 경영사정은 더욱 어려워졌고 근로자들에게 임금이 지불되지 못해 파업에 이르게 됐다.

그것을 빌미로 사업주는 폐광선언을 하면서 그날로 모든 채광이 중지되고 임을수옹의 금과 함께 구봉광산의 역사도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구봉광산의 최종 덕대 박예신옹과 임을수옹은 땅속에 두고온 금을 잊은 지 오래고 나머지 인생을 농사 지으며 열심히 살았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가는 2003년도 세밑, 두 사람은 사라져가는 세월 속을 걸어 옛 구봉광산터에 섰다. 그곳에서 자신들의 청춘을 바쳤던 구봉광산에 대한 30여년전의 추억을 사라져 가는 세월 속에 함께 떠내 보냈다.

"땅속에 두고 온 금 때문에 속병을 많이 앓아 지금도 심장이 안좋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금을 다 캤다면 지금까지 못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으로 오래 전에 잊고 열심히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실업자가 많으면서도 어려운 일을 안하려고 한다는데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는 어려운 일이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그것이 바탕이 되어 좋은 날이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면서 광산 일을 했고 꿈 같은 일을 겪고도 농사 지으면서 잘 살았습니다. 새해에는 모두 열심히 일하는 한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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