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몸따라 마음따라 42> 경남 의령 "봉황대"

등록 2003.12.31 17:56수정 2003.12.3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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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혀진 봉황대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이름 붙혀진 봉황대 ⓒ 이종찬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늘 회한이 겨울바람처럼 휘몰아친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그저 주어진 일상의 늪에 빠져 한없이 허우적거리다가 또 그렇게 한 해를 덧없이 보내고 만 것은 아닌가.

무심코 내뱉은 나의 말 한마디가 그 누군가에게 피눈물이 나게 하지는 않았는가. 혹여 쓸데없는 논쟁에 휘말려 상대편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는가.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도움을 청하는 그 누군가의 손길을 매몰차게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저만치 들판 끝자락에서 아이 하나가 눈이 부시도록 푸르른 하늘을 향해 가오리연을 날리고 있다. 가오리연은 바람을 타고 긴 꼬리를 살랑거리며 마치 낮달처럼 허공을 살랑거리고 있다.

그래. 나도 저 아이만 할 때 들판 끝자락에 서서 튼 손을 호호 불어가며 가오리연을 날렸다. 그리고 그때 나는 가오리연을 날리며 나의 은빛 미래를 엿보았다. 그 은빛 미래 속의 나는 시커먼 수염을 매달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근데 저 아이는 가오리연을 날리며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그때의 나처럼 화가가 되는 꿈을 꾸고 있을까. 아니면 배 고픈 화가보다 멋진 집에 살면서 멋진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부자가 되는 그런 꿈을 꾸고 있을까.

a 봉황대 옆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기암괴석

봉황대 옆에 떡 버티고 서 있는 기암괴석 ⓒ 이종찬


a 마른 나뭇가지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기암괴석

마른 나뭇가지 사이에 웅크리고 있는 기암괴석 ⓒ 이종찬

"무슨 생각을 그리도 골똘히 하고 계십니까?"

"으응. 오랜만에 가오리연을 보니까 어릴 때 생각이 나서."

"여기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일붕사란 팻말이 붙은 저쪽으로 갈까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안내표지판조차 하나 없으니..."

"글쎄 말이야. 아무리 좋은 음식도 수저가 있어야 먹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겠어. 그리고 기왕 간판을 세우려면 '일붕사-봉황대'라고 써놓으면 오죽 좋아."

그랬다. 의령군 소재지에서 봉황대로 가는 길에는 아무리 눈빛을 두리번거려도 '봉황대 가는 길'이라는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일붕사란 간판도 너무나 작고 초라해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었다.

게다가 우리처럼 초행길에 나선 사람들은 일붕사 간판을 바라보고 봉황대 쪽으로 달려가다가도 혹여 길을 잘못 든 것은 아닐까, 하고 차를 되돌릴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일붕사까지 가는 길목을 한동안 달려도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붕사 입구에 도착하더라도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마찬가지다. 기암괴석이 줄지어 늘어선 일붕사 입구에서 아무리 둘러보아도 봉황대란 간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기암괴석 맞은 편에 '봉황' 이란 식당 간판만 하나 덩그러니 붙어 있을 뿐이다.

a 봉황대 꼭대기에는 소나무가 봉황의 벼슬처럼 위태롭게 서 있다

봉황대 꼭대기에는 소나무가 봉황의 벼슬처럼 위태롭게 서 있다 ⓒ 이종찬


a 낭떠러지에서 위태롭게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바위

낭떠러지에서 위태롭게 머리를 드러내고 있는 바위 ⓒ 이종찬

"저어기 말씀 좀 물읍시다. 여기서 봉황대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 아재 내캉 지금 장난치자 카는기가? 아이모 정신이 조금 이상한 기가? 아, 아재 앞에 서 있는 그 방구(바위)가 봉황대 아이가."

이쯤 되면 신발을 손에 들고 신발을 찾는 격이다. 그래. 어쩐지 일붕사 앞에 마치 하늘기둥처럼 줄줄이 떡 버티고 서 있는, 아니 금새라도 티 한점 없는 새파란 하늘로 훨훨 날아가버릴 것만 같은 기암괴석들이 심상치 않게 보이더라니.

그랬다. 일붕사 신도인 듯한 사람에게 핀잔 비슷한 말을 듣고 다시 봉황대를 바라보니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가 아찔하기만 하다. 그 낭떠러지 끝자락에는 마치 봉황의 벼슬처럼 보이는 소나무가 한 그루 위태롭게 서 있다.

"새해가 다가오는 길목에 서서 하늘을 나는 봉황을 잡았으니, 새해에는 운수가 대통하겠습니다."

"운수가 대통하는 게 아니라 잘못하다가는 역모를 뒤집어 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더 많이 드는데?"

"아니 왜요?"

"봉황은 우리나라 왕을 상징하는 영물이잖아. 그렇다고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a 지상의 소원을 하늘에 비는 돌탑처럼

지상의 소원을 하늘에 비는 돌탑처럼 ⓒ 이종찬


a 봉황대 주변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봉황대 주변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다 ⓒ 이종찬

의령군 궁유면 평촌리 일원에 위치하고 있는 봉황대는 마치 엄청나게 큰 장작을 세워놓은 듯한 기암괴석이 봉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봉황대 중턱의 반듯한 평지에 봉황의 화려한 깃털처럼 단청이 곱게 되어 있는 누대가 바로 봉황루다.

봉황대 아래에는 돌계단이 꼬불꼬불 꼬리를 감추고 있다. 그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암벽 사이에 힘겹게 끼어있는 자연동굴이 하나 나온다. 그 동굴에 들어가 겨울잠을 자는 곰처럼 웅크린 채 가쁜 숨을 쉬다가 천천히 빠져나오면 이내 비좁은 돌문이 앞을 가로막는다. 마치 위태로운 절벽에 서서 봉황과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것만 같다.

"이거 봉황을 잡으러 올라가다가 자칫하면 봉황 깃털도 하나 뽑아보지 못하고 절벽 아래 떨어져 죽겠구먼."

"지존을 잡기가 그리 쉬우면 어찌 되겠어?"

비좁은 돌문을 간신히 빠져 나오면 또 하나의 동굴이 백호처럼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있다. 스스로 백호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 동굴 속에는 사시사철 넘쳐 흐르는 약수터가 있다. 마치 맛있는 먹이를 보고 절로 흘러내리는 백호의 침샘처럼 말이다.

"으~ 이 시려. 근데 봉황대는 겨울보다 봄과 가을의 경치가 훨씬 더 좋다던 데요. 특히 가을단풍과 노을이 어울려 춤추는 모습은 정말 끝내준다던데."

"단풍과 노을이 어울려 춤춘다? 이야~ 그 표현 끝내준다."

a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갈 것만 같은 봉황대

금방이라도 하늘을 향해 훨훨 날아갈 것만 같은 봉황대 ⓒ 이종찬


a 신이 빚어놓은 걸작

신이 빚어놓은 걸작 ⓒ 이종찬

봉황대 정상에 오르면 궁유면 일대에 드러누운 텅 빈 들판과 들판 사이를 나룻배처럼 떠다니는 야트막한 산, 그 산 아래 논고동처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윽고 고개를 돌리면 속내를 다 드러낸 찰비계곡 곳곳에는 얼어붙은 용소와 각시소가 부끄러운 듯 하얀 속치마를 은근히 들추고 있다.

"히야~ 정말 끝내준다. 신선들이 사는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 했더니 바로 여기에 있었구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 갑신년 새해에는 봉황을 타고 더 높이 더 멀리 훨훨 날아가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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