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실미도>가 4백만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반지의 제왕>이라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토종 블록버스터'가 눌렀다는 민족적 감성까지 들먹이며 극장가는 물론 신문 지면까지 <실미도> 타령이다.
블록버스터의 불법?
이제는 영화의 제작비는 물론 광고비 자체도 광고가 된다. '광고비를 포함하여' 모두 120억여원 규모의 제작비로 제작되었다는 <실미도>. 그 <실미도>의 주 무대를 이루고 있는 세트장에만도 모두 30여억원이 들었다고 한다. 넘실대는 파도, 혹독한 지옥 훈련, 숨 막히는 막사, 끊임없는 갈등, 영화 전체의 배경을 이루는 세트장을 빼고 실미도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실제로 관객들의 모든 감정 역시 이 세트장 위에서 빚어지고, 그들의 평가 역시 이 세트장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만약 그 모든 것이 불법에 기초하고 있다면 어떨까? '충무로를 좌우'한다는 강우석 감독의 메가폰과 연출, 국민 배우의 몸놀림, 명배우의 명연기, 수많은 조연들의 감동적인 몸짓 모두가 불법 세트장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면?
며칠 전 일간지들은 일제히 인천시 한 공무원의 좌천 소식을 지면에 실었다. 영화 <실미도>의 세트를 불법건축물로 고발했다는 이 공무원을 신문들은 소위 인천의 '시민단체' 말까지 인용하여 "경영마인드가 부재한" 공무원으로 평가했다. "지난날 한맺힌 영령들의 억울함을 세상에 알리려는 영화 제작을 오히려 도와줬어야 했다"는 익명의 공무원 말까지 인용한 언론은 단순한 경영 마인드의 평가를 넘어 감정적 평가로 교묘하게 사람들의 감성을 한 쪽으로 유인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간지들은 120억여 원을 들여 만든 이 <실미도>라는 한국형 블록버스터가 건축허가조차 내지 않고 불법세트장을 지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부 신문들은 '충무로'라는 익명의 일반화된 고유명사를 동원하여 '인천에서는 영화를 제작하지 말자'는 소문을 보편적 주장으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한 마디로 언론들은 '불법을 조장 혹은 묵인하는 곳에서만 영화를 제작하자'는 주장을 아무런 여과없이 독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인가? 토종 <실미도>가 <반지의 제왕>을 누르고 관객 점유율 1위를 차지했으니 불법은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것인가? 상업적 흥행 마인드에 민족적 감정을 교묘하게 배합한 시장의 논리로 불법을 지적한 공무원을 경제 마인드도 모르는 고지식한 무능력자, 희생자들을 기릴 줄도 모르는 냉혈한으로 매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과거를 파헤친 실미도, 현재를 묻다
지금까지 드라마나 영화의 주 무대가 되었던 소위 '관광명소'들은 거의 관리의 무방비 상태에서 숱한 관광객들의 무질서의 전횡에 의해 망가져 왔다. 지방자치단체와 일부 시민들의 '노점식 관광 마인드'가 한적한 시골의 경치를 쓰레기장으로 만들어왔던 사례가 적지 않았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예컨대 '로렐라이'라는 한적한 강가의 그야말로 볼품없는 조그마한 언덕을 전설과 역사, 전통의 결합이라는 종합관광지로 만든 장기적인 관광마인드를 한국에서 찾기란 정말 힘들다.
오늘날 핀란드나 네덜란드와 같이 인구는 물론 임금 등 여러 가지 요건에서 한국보다 불리한 조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나라가 강대국이라 불리는 이유는 준법정신과 법치주의가 확고히 뿌리박고 있으며 사회가 투명하기 때문이다. 수백억 원짜리 쇄빙선 건조를 둘러싸고 단지 몇 만원짜리 향응을 받았다고 공직에서 쫓겨난 핀란드 공무원, 로테르담 시장 재직 시절 16년 동안 겨우 판공비 4백만원을 유용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내무부장관에서 물러난 네덜란드의 전직 장관을 보면 한국 사회가 왜 아직 강대국의 대열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이 분명히 나온다.
혹독한 훈련, 전우들간의 감동, 비장감 넘치는 장면…. 이 모든 것이 불법의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자랑'과는 관련이 없어야 한다. 120억여원을 들일 배포는 있지만 세트장을 합법적으로 짓기 위하여 최소한의 절차도 밟을 정신이 없다면 그 건물은 철거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흥행에 성공한 영화 <실미도>의 세트장은 단지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닐 수 있으며,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았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불법으로 조성된 건축물이어서 그에 대해 제재 조치를 가했다면 그의 원칙을 단지 '경영마인드'와 효율성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상업적 논리이다.
인천시의 이 좌천된 공무원에게 손가락질하기 이전에 '자랑스러운' 토종 블록버스터 <실미도>의 불법 세트장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언론과 호도된 여론, 언젠가는 불법을 찬양하고 고무하는 이 비극적 현실을 넘어야하지 않을까? 실미도는 북파공작원들과 잊혀진 과거의 역사를 파헤쳤지만, 그 파헤친 흙더미 속에서는 또 다른 비극의 현실이 묻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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