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를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었어요"

푸른 작가를 꿈꾸는 아이들과의 하룻밤

등록 2004.01.14 14:20수정 2004.01.1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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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청소년문학워크숍을 마치고

청소년문학워크숍을 마치고 ⓒ 안준철


까마득한 아침에
교문이 어김없이 열리고
어데 종 치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학생들이
지각을 피해 휘달릴 때도
교문을 통과하지는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잔소리를
친구와의 부지런한 수다로 참아내고
큰 급식실 비로소 문을 열었다.
지금 눈꺼풀 내려오고
수업의 끝은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수면의 씨를 뿌리리라.

또다시 반복되는 지각의 뒤에
회초리 타고 오는 잔소리 있어
이 교실에서 목놓아 수다떨리라


아실만한 분은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육사의 <광야(廣野)> 패러디입니다. 지하에 계시는 육사 선생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 지 궁금해지네요. 모르면 몰라도 "발칙한 놈들!" 하시다가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배시시 웃음을 흘리지나 않으실 지. 그래도 꼿꼿한 지사 풍모의 시인께서 충격이 아주 없지는 않을 터인데요.

저도 오랜만에 뼈 속까지 시원한 웃음을 한 번 웃어보았습니다. 그 웃음의 끝자락에서 슬픈 생각이 잠깐 든 것은 "눈꺼풀 내려오고/ 수업의 끝"이 "홀로 아득" 하여 늦은 밤 차가운 교실에서 "수면의 씨를 뿌리"는 열악한 교육환경 속에서도 아직 녹슬지 않은 그들의 문학적 '끼'가 대견스럽기도 하고, 그것을 제대로 살려주지 못하는 교사로서의 죄스러운 마음이 작용한 까닭이었지요.

년실업이 오십만에 달하고
란스러운 국회가 정치하는 나라
(연)이은 경제불황으로 사람들 간에는 인정의
이 닫혀만 가는 우리 나라
수고대하며 희망찬 미래를 기다린다


a 오행시와 패러디를 발표하는 동주반

오행시와 패러디를 발표하는 동주반 ⓒ 안준철


이 오행시('청소년문학')를 보고 또 한바탕 웃었는데요. '요즘 애들'이 세상을 결코 허투루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그 웃음 끝에 깨닫게 되었지요. 놀이 삼아 하는 '오행시'라고 해도 좋은 글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하기 마련입니다. 슬픈 것은 아이들 눈에 비친 우리 정치인들의 모습이 일그러져 있다는 것. 그래도 일그러진 것을 일그러지게 보았으니 잘한 일이지요. 또한, 그런 맑은 눈을 가진 젊은이들이 있으니 우리의 미래가 어둡지 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a 둘이 있어도 글은 혼자서 -백일장 풍경

둘이 있어도 글은 혼자서 -백일장 풍경 ⓒ 안준철


패러디와 오행시의 습작기(?)를 거쳐 제 가슴 속 비밀을 드러내놓고 몸과 영혼을 짜서 써야하는 진짜 글에서는, 놀랍게도 제법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이혼이나 가정폭력 등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하나씩 안고 살아가고 있었는데요. 다행히도 아이들은 시퍼런 얼음장 밑을 흐르며 '순한 본질'을 회복해 가는 '겨울 강'처럼 자신의 상처와 화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a 글이 잘 안풀리는 것일까?

글이 잘 안풀리는 것일까? ⓒ 안준철


-바람은 차가웠으나 오후 햇빛이 따스해서 슬픔을 덜 수 있었다. 강가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털썩 주저 앉으셨다. 눈물을 흘리고 계셔서 곁에 가서 닦아 드렸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서로 침묵했다. 시간이 흐르고 엄마가 한결 기분 나아진 목소리로 내게 말을 하셨다.


"엄마는 슬프고 힘들 때마다 강가를 찾는단다. 흐르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안 좋은 일들도 저 물과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아서."

그때 엄마랑 본 겨울강의 풍경을 나는 잊은 적이 없다.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온기로 느껴지며 날 사로잡는 묘한 기분에 잠긴다. 나는 겨울 강의 차갑고도 맑은 모습에 흠뻑 빠져 버렸다. 물위에 언 얼음은 유리보다 강할 것 같고 늘 그 모습 그대로가 사랑스럽다. 가슴 시린 과거도 지니고 있는 나는 속으로 홀로 고백한다. 난 죽어서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겨울 강이 되고 싶다. 그 차가운 모습에 순한 본질을 닮고 싶다.-



a 시낭송하는 아이

시낭송하는 아이 ⓒ 안준철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100명 안팎의 이 지역 청소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깊은 산중에서 1박을 한다는 사실만으로 저는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문학이 그만큼이나 대단한 것인가?' '문학이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유익을 줄 수 있는가?' '왜 문학을 하는가?' 누군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막상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쩔쩔 맬 것 같기도 합니다만.

1박 2일의 일정에서 <스스로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의 저자 김진경 시인이 첫날 강연을 맡아 주셨습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자신의 죽음 앞에서 "아, 내가 죽는구나!"라는 어떤 인식이나 생각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죽음을 인식한다는 것은 시간성, 곧 생의 유한성에 대해서도 인식한다는 말인데요.

인간의 평균수명이 칠십년쯤 된다면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세월은 불과 사십년 안팎인데 그 중 몇 년을 싹 잘라서 아예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포기하고 살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강사의 말은 참으로 공감할 만 했습니다. 가령, 이런 식의 말.

"고등학교 3년은 네 인생이 아니라고 생각해. 오직 대학입학만 생각하란 말이야. 알았어!"

a 시와 노래 공연- 바이올린과 오보에

시와 노래 공연- 바이올린과 오보에 ⓒ 안준철

우리나라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입학을 준비한다지요. 무려 10년 가까운 세월을 대학입학이라는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삶의 모든 풍성한 세목들을 희생해야 하는 구조는 분명 잘못된 것이지요.

중학교 3년 과정이 오로지 고교입학에만 의미가 주어지고, 고등학교 3년 과정은 대학입학에만, 그리고 대학에서의 학문이 취업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된다면 결국 인생의 절반은 수단화되어 잘려나가고 마는 셈이지요. 흔히들 말하는 국가경쟁력도 형편이 없게 되겠지요.

왜 문학을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일상성에 의해 삶이 수단화되기를 끊임없이 요구받는 상황 속에서 인간 본연의 자기 자리를 찾아가도록 스스로에게 요구하면서, 밖으로는 생명의 고유한 가치에 반하여 인간을 상품화시키고 수단화하려는 모든 세력에게 싸움을 거는, 그것이 문학(혹은 예술)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는데요. 그런 문학마저 오로지 입시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다면 앞이 캄캄할 일이지요.

강연이 끝난 뒤 바로 모둠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모두 합쳐 여섯 모둠. 우리나라 대표시인의 이름을 따서 소월반, 만해반, 지용반, 육사반, 동주반, 백석반, 그리고 소설반은 벽초반이라 지었는데요. 각 모둠별 담임 작가(순천작가회의 회원)와 지도교사(문예담당교사)가 배정되어 서로 인사를 나누었지요. 이어서 강연에 대한 모둠 토론과 함께 다음날 모둠별로 선보여야하는 오행시와 패러디, 그리고 촌극 등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시작되었고요.

저녁시간에는 <시를 노래하는 달팽이들의 포엠 콘서트>라는 길고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노래패의 공연이 있었는데요. 시를 노래로 만들어 보급하는 사람들. 그들은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음악 자체를 사랑하여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보에를 연주하는 악사는 잠을 자면서도 악기를 품에 안고 잔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아이들이 그 소리에 반할 만도 했지요. 그런 황홀하고 감동적인 음악을 듣고서는 인생을 함부로 살 것 같지 않다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요.

뒤이어 학생들끼리 얼굴을 익히고 친목을 다지는 레크리에이션 시간에는 순천작가회의 회원들과 문예담당교사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져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문학은 학문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문학적 체험을 함께 나눔으로써 개인의 문학세계를 열어 가는 것이라는데 모두 동의하는 분위기였지요.

a 벽초반의 촌극 공연

벽초반의 촌극 공연 ⓒ 안준철

그날 밤, 모둠 발표를 준비하며 아이들과 나누었던 무수한 대화들. 차가운 바람도 아랑곳없이 함께 손을 잡고 거닐었던 아침 산책길. 우리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새삼스레 일깨워준 전성태 소설가의 두 번째 강연에서의 감동. 그리고 끝내 저를 울리고만 벽초반의 촌극 공연 등에 대해서는 생략할까 합니다. 대신 순천작가회의의 공식 홈페이지인 '사람의 깊이'(cafe.daum.net/sunchonpoem)에 올라온 한 아이의 글을 소개하면서 부족한 글을 마치지요.

'아마 제가 짧지만 17년 동안 살아오면서 기간은 제일 짧았지만 가장 뜻 있고 재미있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백석조로 친구들과 언니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고, 선생님들의 강의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고, 그리고 박두규 선생님과 산책을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문학 워크숍을 다녀오고 달라진 점이 있어요. 바로 여러 시나 글을 볼 때 전에 없었던 새로운 감정이 생겼다는 것, 처음으로 시를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은 것 같아요. 조금 더 노력해서 고급 독자가 되어 보려구요.'

덧붙이는 글 | 지난 1월 10일부터 순천 청소년수련원(유스호스텔)에서 1박 2일 동안 진행된 '2004 청소년 문학워크숍' 행사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순천지부가 주관하고 문화관광부가 후원했으며, 저도 이 행사에 만해반 담임작가로서 참석을 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1월 10일부터 순천 청소년수련원(유스호스텔)에서 1박 2일 동안 진행된 '2004 청소년 문학워크숍' 행사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순천지부가 주관하고 문화관광부가 후원했으며, 저도 이 행사에 만해반 담임작가로서 참석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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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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