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와 분단 상황을 고려할 때, 외교안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특히 북미간의 대결 해소, 한미동맹 재조정, 미국의 이라크 침공 및 한국의 파병 문제와 같이 어려운 숙제들을 떠 안은 노무현 정부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은 한마디로 '부실투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노무현 대통령 스스로가 상대적으로 외교안보 문제의 문외한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대통령의 부족한 자리를 채워야 할 보좌진과 참모진도 어려운 난국을 타개할 만한 역량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외교안보가 가장 중요한 시점에 이 문제를 풀어갈 전략가가 부재하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지독한 역설이자 불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윤영관 외교부 장관의 '사실상의 경질'은 이러한 문제점이 폭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다수 언론과 정치권은 윤장관의 경질을 외교부 일부 관리들의 발언이나, 외교부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이의 권력투쟁의 결과로 보고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 후보 시절에 통일, 외교, 안보 문제를 자문하고 정책을 마련해줄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있어서, 윤영관 장관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이 대선 캠프에 합류해준 것은 대단히 고마운 일이었다. 이러한 인연을 바탕으로 윤장관 외에도 노 후보의 참모로 활약했던 이종석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NSC 사무차장으로, 서주석 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NSC 전략기획실장으로, 서동만 상지대 교수는 국가정보원 기조실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그런데 믿었던 이들 외교안보 핵심 참모들은 노 대통령에게 '북-미 대결'을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풀어가는데 믿음을 주지 못했다. 쉽게 말해 '코드'가 맞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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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지지 않은 외교적 재앙
일례로 2003년 5월 한미정상회담과 7월 한중정상회담은 노 정부 외교안보팀의 '전략 부재'와 노 대통령의 '드러나지 않은 좌절감'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작년 방미 때 노 대통령의 지나친 친미·반북 발언들과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공동성명 채택으로 국내의 개혁·진보세력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에 직면한 바 있다. 노 대통령으로서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실한 한미정상회담의 재앙은 두 달 뒤인 7월 한중정상회담에서 나타나고 말았다. 당시 한국과 중국 정부는 정상회담을 통해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로 하고, 문안 조율에 들어갔다. 노 대통령의 중국 방문 전에 중국은 공동성명 초안을 보내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제안했다. 하나는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 배제'이고 다른 하나는 '북핵 문제와 안보 우려 사항의 동시적 해결'이었다.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았던 두 내용에 대해, 윤영관 장관을 비롯한 외교안보 참모진들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 두 가지의 내용을 담은 한중 공동성명이 발표될 경우, 한미관계가 불안해질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5월 한미공동성명에서 '북한의 선(先) 핵포기'와 '상황 악화시 추가적 조치'에 합의를 해놓은 상황에서, 중국측의 제안을 수용할 경우 한미공동성명을 어기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논리였다.
결국 노 정부는 중국측의 제안을 수용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노 대통령의 방중 때 한중공동성명 발표가 늦어지게 된 것이다. 중국이 제안한 '북한에 대한 무력 사용 반대'와 '동시적 해결'은 결국 공동성명이 아닌, 후진타오 주석의 발표로 나오는 것으로 매듭짓게 된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이 외교적 재앙은 중국은 한국을 다시 보고, 노 대통령은 외교안보팀을 다시 보게 만든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과 평화'를 대선 최후의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노무현 대통령으로서는 어리둥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노 대통령의 실망감과 좌절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이라크 추가 파병 과정과 용산기지 이전 협상에 있어서도 이른바 '노심(盧心)'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초 노 대통령은 추가 파병과 관련해 의료·공병대대 위주의 비전투병 파병을 선호했지만, 외교안보팀은 '한미관계'를 들어 전투병 파병을 관철시켰다. 용산기지 이전 협상에서도 노 대통령은 '불평등성'을 지적했지만, 외교안보팀의 '한미관계' 논리에 막혀 미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결국 이번 윤영관 장관에 대한 사실상의 경질은 이러한 문제들이 누적되어온 과정에서, 윤 장관이 외교부를 제대로 통솔하지 못하고 일부 관리들의 "묵과할 수 없는 발언들"이 나오면서 이뤄지게 된 것이다.
만약 윤 장관이 노 대통령이 말한 '자주적인 균형외교'를 제대로 수행했다면, 일부 관리들의 문제성 발언 때문에 장관을 경질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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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 정쟁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대단히 우려스러운 일은, 정치권이 자의적인 해석에 기초해 윤 장관의 경질을 정쟁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의 박진 대변인은 윤 장관 경질을 "'노무현 코드 외교'의 진원지인 NSC가 주도하는 `외교부 대학살'"이라고 규정하면서, "한미동맹관계에 몰고 올 엄청난 후폭풍에 대해 전적으로 노 대통령이 책임져야 한다"며 노 대통령을 겨냥했다.
민주당의 유종필 대변인 역시 논평을 통해 "외교라인의 혼선과 갈등은 노 대통령과 청와대 외교팀에 있는데, 경질의 대상이 뒤바뀌었다고 본다"면서, "이제 외교부는 노 대통령에게 애교나 부리는 `애교부'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스럽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두 당이 주장하는 것처럼, 윤장관 경질은 외교부와 NSC 사이의 갈등의 산물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현재의 NSC는 기본적으로 반미도, 자주파도 아니다. 오히려 NSC는 '기회주의적 친미 행태'로 비판을 받고 있을 정도이다.
흥미로운 점은, 한나라당의 경우 노무현 정부 출범이후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고, 이종석 차장 등 일부 인사들에 대한 비난에만 몰두해오고 있다는 점이다. 정책에 대한 비판이 없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노무현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이 '보수화·친미화'되었기 때문인데, 정작 이러한 외교안보를 주도해온 NSC를 '자주파'니, '반미'니 하면서 비난하고 있는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민주당 역시 마찬가지이다.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의 정통 계승자'임을 자처하는 민주당이 정작 노무현 정부 외교안보 수뇌부 가운데 햇볕정책을 가장 많이 훼손한 윤 장관의 경질을 문제삼고 있다. 윤 장관은 '핵문제와 남북경협을 연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핵문제가 풀리기 전에 남북정상회담을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노 대통령에게 일관되게 자문해온 인물이다.
이러한 두 정당의 자기모순은 중대한 외교안보문제를 '당리당략' 차원에서 '노무현 때리기'로 악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정책에 대한 비판은 없고, 색깔론이나 '배신감'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외교안보를 다루고 있는 정치권의 한심한 작태야말로 '구태 중에 구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외교안보팀 전면 쇄신해야
오만한 미국과 까다로운 북한, 그리고 속내를 알기 어려운 중국과 얄미운 일본을 상대로, 노무현 정부가 외교안보 정책을 펼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외교안보정책의 실패는 일시적인 어려움이 아니라 총체적인 난국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치밀하고도 전략적인 외교안보정책을 마련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는 사람과 시스템의 문제이기도 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윤 장관 경질을 계기로, 외교안보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인 검증과 인적 쇄신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노 대통령 본인 스스로가 확고한 외교안보의 원칙과 목표를 세워야 한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는 외교안보 문외한이었을지 모르지만, 1년이 지난 지금, 노 대통령 스스로도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참모진과 보좌진에 '의존'하는 방식에서, 이들을 지휘통솔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국정수행 방식을 바꿔야 할 것이다.
외교안보 시스템의 재편과 인적 쇄신은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먼저 문제가 되고 있는 외교부 북미라인의 경우, 단순히 문책으로 끝낼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쏠려 있는 북미라인의 권한과 임무를 분산시켜, 다른 부서들도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 정비에 나서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통일·외교·안보 정책을 조율·총괄하고 국가전략을 수립하는 임무가 주어진 NSC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인적 쇄신을 단행해야 할 것이다. 다른 부처와 주도권 경쟁을 벌이고 사안에 쫓겨 임기응변식 처방을 내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이는 방식으로는 NSC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실질적으로 부처간 조율과 정책 총괄, 그리고 전략 수립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안보보좌관을 선임하고 역량과 전문성에 부합하는 형태로 인력 구조를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NSC 재편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대결이 중차대한 만큼, 이 문제에 전념할 수 있는 '핵정책 조정관'을 임명하는 방안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클린턴 행정부 때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해 대북정책을 마련하게 한 것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통일·외교·안보를 아우르는 전문성과 역량을 갖춘 임동원 전 특보를 활용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는 임동원 전 특보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대북송금 문제로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에 선고된 상황이고 한나라당과 보수언론의 강한 반발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은 선택이겠지만, 핵문제가 민족의 생사가 달린 문제인 만큼, 노 대통령의 용단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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